왜 망했냐구요?
최애 브랜드가 망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수리남>을 봤다.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한 가운데 가장 반가웠던 건 다름아닌 휴대폰이었는데, 바로 칼같이 샤프한 모토로라 레이저였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까지 가장 애정했던 휴대폰인 만큼, 지금 봐도 여전히 갖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커버 이미지가 모토로라 레이저다)
그 시절의 모토로라는 대단했다. 아니 그 이전부터 대단했다. 지금의 애플과 같은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세계 최초로 휴대폰을 개발해서 상용화한 회사. 96년도에 무려 88g의 스타택을 내놓은 회사(기능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아이폰14의 절반 무게이다). 출시 1년 반만에 레이저를 1억대 이상 팔아치운 회사이자, 불과 11년 전까지 세계 휴대폰 판매량 1위를 굳건히 지켜온 회사가 모토로라였다.
그런 모토로라가 하루아침에 시장에서 사라졌다. 모바일 사업부가 망한 것이다. 이후에는 구글을 거쳐 중국의 레노보 등에 이리저리 팔리다가, 이제는 IT나 경제뉴스에 기사 한 줄 조차 나오지 않는 신세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모토로라가 어쩌다 망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전성기의 매출이 핀란드 GDP의 20%를 차지했던 노키아도 그렇다. 생각해보면 옆나라의 파나소닉과 샤프도 그렇다. 한 때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위대했던 브랜드가 말 그대로 소비자의 선택지에서 사라져버렸는데, 사람들은 그 과정과 이유에 대해 생각보다 궁금해하지 않는 듯 하다. 나도 그랬다.
최애 브랜드의 흥망성쇠도 모르는데, 매일 사라지는 2,000개 사업자의 히스토리는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당신의 사업이나 프로젝트라면 어떨까. 당신이 실패하더라도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누구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덧) 위 회사들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뿐, 여전히 B2B영역에서 엄청난 규모의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왜 망했냐고요?
우리도 누군가에겐 그런 브랜드일 수 있다. 사업을 정리한지 1년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도, 런칭했던 브랜드의 소셜미디어 계정으로 종종 문의가 들어온다. 기다리고 있는데 왜 신제품이 나오지 않는지, 왜 더 이상 브랜드를 운영하지 않는지.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만, 과거의 고객분들에게 어떻게 답변을 드려야 할지 고민할때마다 죄송하고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사업을 그만두고 원하는 곳에 취업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 덕분이었다. 나는 내가 어째서 망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면접에 들어갈 때마다 아래와 같은 대화가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사업은 왜 정리하셨나요?"
"스스로 한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재무, 생산, 운영, 마케팅 등 여러가지 영역에서 내부적으로 뚜렷한 한계가 있었으니까요. 저희는 단 한 가지 분야에서도 전문성을 가진 팀이 아니었습니다.“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을 채용해서 해결할 수도 있지 않았나요?"
"그만큼의 인건비를 투입할 자본과 수익의 규모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배워서 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개인과 조직의 성장이 너무 더뎠고요. 그런 접근은 하나의 뾰족한 무기를 가지고 시장에 진입해서 균열을 낼 수 있을 때에만 시너지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오래 하셨는데요. 성과가 꽤 좋았을 때도 있고요."
"저희 상황을 알았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고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뚜렷해지고, 할 수 있는 걸 조금 더 잘 하면 살 길이 보였고요. 최대한 부딪히고 실패하는게 효과적이었던 것 같고, 가끔은 운도 따라줬던 것 같아요."
"첫 번째 비즈니스 모델은 수익률이 상당했을텐데, 왜 그만두고 피봇팅을 했나요?"
"스스로 만든 방향성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완성도 낮은 서비스로 일회성 트렌드에 편승한 만큼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팀원 모두가 알고 있었고, 지금 수익성이 좋더라도 언젠간 망할 비즈니스 모델에 전력을 다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재창업 대신 저희 회사에 합류하시려는 이유가 있나요?"
"첫 번째는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과 일하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이고, 두 번째는 사업을 할 때처럼 잘하든 못하든 닥치는대로 다 하는 것을 그만두고 시장에서 제 나름의 뾰족함을 갖추기 위함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여기서 맡게 될 업무는 사업할 때 생사를 걸고 고민했던 영역인 만큼, 성과를 내기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으로 예정돼있던 면접은 걸핏하면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왜 망했는지, 다른 대안은 무엇이었는지, 뭘 배웠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단순한 지원자 이상의 관심을 받았다.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재취업을 하든 재창업을 하든, 당신이 가진 하나의 기승전결과 거기서 나오는 인사이트는 큰 무기가 된다.
무용담보다 값진 경험담
소비자나 외부인의 시선에서는 모두 하루아침에 망한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기업들도 그러한데,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당신만큼은 그 시선에 동의하지 말고, 나의 언어로 정리가 될 때까지 충분히 회고했으면 좋겠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걸 다 해봤다면, 분명 일련의 과정과 그에 따른 히스토리가 남기 때문이다. 당신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거나 사업에서 실패해본 경험이 있다면. 아래와 같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제안하고 싶다.
1. 사업/프로젝트를 진행 중일 경우
최소 월 1회, 가능하면 주 1회라도 한 주의 회고를 기록으로 남겨보길 권한다. 어느 시기에 무슨 이슈가 있었고, 누구랑 어떤 의사결정을 했는데 그 결과는 어땠는지 말이다. 장담컨데, 우리는 그만큼 기억하지 못한다. 창업부터 사이드 프로젝트까지 '내 일'을 하고 있다면 대개 하나부터 열까지, 사소한 일들 모두 스스로 챙겨야 하는 상황일 것이다. 그만큼 매몰되기 쉽고, 이야기의 디테일한 연결고리는 잊힐 확률이 높다.
이 기록을 오답노트처럼 주기적으로 볼 필요는 전혀 없다. 그저 꾸준히 기록하고 어딘가에 보관해두기만 하면 된다. 필요한 시점이 왔을 때, 한 번 흝어보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경험이 생생하게 떠오를 테니 말이다.
2. 하나의 사업/프로젝트를 이미 끝낸 경우
인터뷰의 매력은 기본적으로 '누구나 궁금해 할 내용'을 한 사람으로부터 끄집어낸다는 점에 있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당신의 프로젝트와, 다른 사람들이 알고 싶은 당신의 프로젝트는 다를 수 있다.
편안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을 만나서, 당신의 사업/프로젝트에 대한 질문을 최대한 많이 받아보자. 다양한 업계의 사람들일수록 좋다. 무슨 의도로 어떤 결정을 내렸으며 그게 프로젝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거기서 당신은 무엇을 배우고 얻었는지 말이다. 어쩌면 당신도 잊고 있던 일련의 연결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한 비즈니스의 흥망성쇠를 쉽고 완성도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모토로라나 노키아 같이 거대한 글로벌 기업이 망한 이유를 객관적으로 들으려면, 금융∙테크∙디자인 등 최소 몇 개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셔야 할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게 당연하다.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서, 내부적으로 어떤 의사결정이 어떠한 결과를 낳았고 이로써 비즈니스에 장∙단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까지 알려면, 과거의 CEO와 임직원들을 인터뷰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왜 망했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일개 자영업자가 망한 이야기에 아무도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미지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고, 당신은 그곳에서 살아서 돌아왔으니 말이다. 설명하는 걸 넘어서 그걸 경험해봤다는 건 분명 의미있는 자산이다.
도전하는 사람들 주변에는 언제나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당신 옆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무용담이 아니라, 결과와 상관없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끝까지 가본 자들의 솔직한 경험담이다. 재창업을 하든 재취업을 하든 우리가 몸담은 시장이나, 우리가 참가할 경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어떤 선택을 하든 앞으로도 우리는 비슷한 일을 해 나갈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기 위해 잘 정리된 사례집이며, 그게 곧 당신의 경험담이 지닌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