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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희윤 Oct 30. 2022

자기주도적으로 망하기

내 손으로 망하는 것이 낫다

피할 수 없는 이별이라면


우리에게 진지하게 만나는 연인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잔인하지만 두 사람은 절대로 잘 될 수 없는 운명에 있다고 치자. 둘 중 한 사람의 잘못으로 관계는 깨어질 예정이고, 누군가는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아래의 상황 중에서, 가장 나은 케이스는 무엇일까?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4가지이다.)


A) 상대방이 잘못을 했고, 당연히 내가 이별을 통보하여 관계를 정리

B) 상대방이 잘못을 했고, 고민 중에 상대방이 스스로 관계를 정리

C) 내가 잘못을 했고, 별 수 없이 내가 책임지고 알아서 관계를 정리

D) 내가 잘못을 했고, 이를 만회하려 했으나 상대방이 관계를 정리

 

많은 사람들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상황으로 A)를 선택할 것이다. 누구나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성인군자로 남고 싶은 법이고, 동시에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에 응당한 처벌(이별 통보)을 날리는 집행자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연인들이 헤어지기 전에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며 싸우고, 두 사람의 관계가 실패한 데에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려고 하는 듯 하다.


대안으로는 C)도 나쁘지 않은 케이스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우리는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적어도 그 실수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어른스러운 자세 말이다. 현실에서나 미디어에서나 우리는 종종 이런 대사를 들을 수 있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잘못했으니 책임지고 떠날게. 앞으로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길 바라."


그러나 몇 번의 이별을 겪어본 입장으로서, D)의 상황이 그나마 가장 나은 결과로 이어졌다. 내가 실수를 하고, 이를 바로잡고자 진심으로 노력하고, 그럼에도 해결하지 못해 아픈 교훈으로 각인되는 상황 말이다. 모든 만남이 해피엔딩일 수는 없는 법이고, 함께 행복할 수 없을 운명이라면 개인이라도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낫다. 이기적인 얘기일지 몰라도, D)와 같은 상황을 겪을 때마다 나는 형편없는 연애 상대에서 조금씩 나은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지금은 나에게 과분한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앞두고 있다.


내 손으로 망하는게 낫다


위의 4가지 케이스를, 프로젝트나 사업을 할 때 마주치는 상황에 대입해보자. 똑같이 망하는 건 피할 수 없다는 가정 하에.


A) 외부적인 문제 + 적극적 해결

B) 외부적인 문제 + 제한적 대응

C) 내부적인 문제 + 제한적 대응

D) 내부적인 문제 + 적극적 해결


많은 사람에게 IMF(1997년 외환위기)는 B의 상황이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잘못한 것도 없었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착실하게 회사를 다니던 직장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고, 전례없이 얼어붙은 시장과 30%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금리가 자영업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기업들이 속수무책으로 도산했고, 평범했던 가정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풍비박산 나는 경우도 흔했다.


잘잘못과 책임 소재를 떠나서 예측하기 힘든 외부적인 요인과, 이에 대해 아무것도 대응할 수 없던 무력감은 IMF가 지금까지 전국민적 트라우마로 남은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때는 지금처럼 경제 상식이 보편화된 시대가 아니었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개인 차원의 대응은커녕, 상황에 대한 구제책 또는 사회안전망도 전무했을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내 잘못으로 망하는 것이 낫다.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든 우리의 실패를 D)의 상황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외부에서 발생하는 위기에 휩쓸리느니, 내 스스로 사지로 걸어들어가는 것이 낫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을 무기력하게 구경하느니, 질 싸움인 걸 알면서 발버둥쳐보는 게 낫다. 일련의 시행착오로 각인된 경험과 데이터는 어떤 식으로든 다음 경기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확률이 높다.


애플이 쏘아올린 거대한 공

 

2020년 말, 페이스북은 애플에 선전포고를 한다. (커버 이미지는 뉴욕타임즈에 실린 페이스북의 입장문) 애플이 발표한 새로운 개인정보 보호 정책이 페이스북 광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상공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페이스북 매출의 97%는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맞춤형 광고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하는 글로벌 기업부터 소규모 자영업자까지 페이스북∙인스타그램 광고를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우리도 그 소상공인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매출은 페이스북∙인스타그램 광고를 통해 발생하고 있었다. 2021년 봄, 애플은 공언한대로 페이스북으로 흘러가는 아이폰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끊어버렸다. 페이스북이 소상공인의 수익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몰라도, 큰 피해가 갈 것이라는 주장은 정확했다. 광고 성과는 반토막 이하로 떨어졌고, 우리의 매출도 그러했다.


당혹스러웠다. 이전에는 3만원짜리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드는 광고비용이 3천원이었다면, 갑자기 1만원을 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이폰 사용자의 개인정보 수집이 중단되면서 맞춤형 광고 알고리즘의 정확도가 1/3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수십 번의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와 같은 수익률이라면 본전은커녕 팔수록 손해였다. 수익구조상 광고 제작∙운영 능력(마케팅)은 우리가 가진 거의 유일한 무기였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개인정보 보호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외부적인 요인)이었고, 심지어 상대는 애플이었다. 페이스북조차 뾰족한 대안이 없어 여론에 호소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제한적 대응). 완벽한 B케이스. 고민 끝에 일단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기로 했다.


가장 유력한 건 버티컬 플랫폼(패션∙식품∙리빙 등 한 가지 카테고리만 판매하는 플랫폼) 입점이었다. 광고 비용을 지출하지 않는 대신 플랫폼에 수수료를 내고 그들이 확보한 사용자에게 판매하는 방식이다. 그 전까지는 광고를 통해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20%에 달하는 수수료를 내고 플랫폼에서 판매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는 3만원짜리 상품을 판매하면 6천원의 수수료를 플랫폼에 내야 하는 상황. 폭증한 광고 비용보다는 나았지만, 수익률을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가격 인상이 불가피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플랫폼에서 잘 팔리는 품목/옵션/시기는 또 달랐는데, 플랫폼 판매는 처음인 만큼 언제 어떤 상품이 잘 팔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생산량과 생산시기를 산정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고, 잘 팔릴 땐 재고가 없거나 안 팔릴 땐 재입고가 이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경험과 데이터가 부족했던 우리는 결국 자금이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에 처했고, 이를 돌파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가 한계에 부딪히며 몇 달 뒤에 사업을 정리하게 되었다. 자금과 경험 부족(내부적인 요인) + 문제 해결 실패(적극적 대응). 우리의 도전은 D케이스로 끝났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버티컬 플랫폼 중 하나에 입사했다. 마지막 시도로 유통방식을 바꾸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버티컬 플랫폼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의 이력을 좋게 봐주신 덕분이었지만, 나 또한 플랫폼 안에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름의 인사이트를 갖췄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실패할 건 실패하게 되어있다. 우리의 경우 애플이 쏘아올린 거대한 공 외에도 빈약한 자본과 경험, 취약한 수익구조 등 망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문제를 내부로 끌어들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봤기에 다음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또 모르는 일이다. 언젠간 이러한 대응이 전화위복을 낳고, 드라마틱한 반전을 가져다줄지. 마치 코로나19가 많은 이들에게는 위기였지만, 누군가에겐 엄청난 기회였던 것처럼.


망해도 된다. 대신 끝까지 주도권을 내어주지 말고, 내 손으로 망하자. 그러면 분명 다음 게임은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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