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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공부 Jan 17. 2024

희망하지 않은 파업

-엄지 손가락이 하는 일-

나는 요즘 때 아닌 파업을 하고 있었다.


2023년에는 사고가 많았다.

발등에 가위가 떨어져 꿰맸는데 이번에는 엄지 손가락이 말썽이었다.

사고는 12월 말에 중요한 모임에 나가려다 일어났다. 나가기 전에 집안일을 다 해놓고 가려고 애완견 간식을 잘라주는 가위를 급하게 닦다 그만 가위날에 손이 베었다. (이번에도 또 가위였다)

급한 마음에 고무장갑도 끼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드디어 며칠 전 꿰맸던 실밥을 풀었다.


우리 몸 중에서 손가락 끝에는 많은 신경이 지나가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손가락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자꾸 움직이고 힘을 쓰게 되어 다른 곳보다 더디게 낫는다는 것이다.

 2주일간 물을 묻혀서도 안 되고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의사항을 지키기 위해 나는 모든 가사로부터 해방되었다.  딸은 이 기회에 푹 쉬라며 때마다 자유배달 급식권을 주어 음식을 시켜 주었다.

하지만 마음까지 자유롭지는 못했다.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꼭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필 오른손가락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하기 어려운 일이 참 많았다.

나이가 더 들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살아야 하는 때가 온다면 얼마나 힘든 일일지 조금이나마 실감해 볼 수 있었다.


남편이 내손을 대신해 부엌일을 해주고 있지만 남편이 하는 것은 답답하고 못마땅하기 일쑤이다.

남편은 그동안 내가 옆에서 보조를 해줘야 음식도 만들 수 있었던 사람이다. 쉽게 말해 가사에 일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열심히는 하는데 내가 보기엔 답답해서 속을 뒤집는다.

그래도 참고 꾸준히 일을 함께하는 이유는 언젠가는 우리 둘 중 한 명만 남을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음식도 같이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릇하나 닦고 퐁퐁 꾹 짜고, 이렇게 설거지를 하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물도, 세제도 많이 쓴다.

아마 이번 달 수도요금은 전체 아파트 세대 중 탑이 될듯하다.


사실 그동안 나는 거의 집에서 먹고 노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무 일도 안 하다 보니 오히려 그동안 내가 했던 많은 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엄지 손가락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무심코 하던 일의 대부분이 엄지손가락의 힘이 필요했다는 것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남편의 거친 설거지 소리를 듣고 있으려면 마음이 불편하다.

온통 부엌에 물이 튀겨 홍수 난 듯한 부엌 바닥을 남편 몰래 발로 슬쩍 닦아낸다.

냉장고 속도 며칠 만에 뒤죽박죽이 되어 싹 정리하고 싶다. 하지만 입을 닫고 참기로 했다.

목욕탕 세면대도 자꾸 거슬린다. 눈을 감고 며칠 뒤로 미룬다.

청소도 해주긴 하지만 남편은 위부터 물건을 정리한 후에 청소기를 돌리는 게 아니라 무조건 청소기만 돌리니 청소를 한 듯 만 듯 마음에 안 든다.

양파 까는 일도, 사과 하나도 혼자 썰어서 먹지를 못한다.

남편은 딸기 꼭지를  가위로 다 딴 다음 깨끗하게 정리하고 씻어댄다.

(아... 수용성 영양소가 다 빠져나가네 ) 잔소리하는 것 같아 또 입을 꾹 다문다.

포기김치를 썰어야 하는데.... 그냥 파김치 하고만 밥을 먹는다.

배달음식을 먹어도 분리할 일이 많은데.... 잘하는지 자꾸 감독하게 된다.

우리 애견 보미의 그릇 닦는 스펀지와 자꾸 헷갈리는 남편 곁에 서서 또 감독하게 된다.

손톱발톱도 그새 길어져서 답답하다. 안경을 닦을 때도 엄지손가락 없인 닦아지지 않는다. 제일 답답했던 건 손글씨를 쓸 수 없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뭔가 써두고 싶은데 삐뚤빼뚤 초등생 글씨가 되어버렸다.

새해시작마다 결심하고 쓰는 다이어리도 엊그제까지는 빈칸이다.

집안 곳곳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실밥은 풀었지만 아직도 단추를 잠글 때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글어질 정도로 힘쓸 때 아프다.

내 생각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게 너무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나와 엄지 손가락은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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