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로르카를 지나 에스테야에서 먹고 자고 쉬며 사흘을 보내다
오바노스(Obanos)에서는 다른 때보다 더 늦게 출발했다. 기침이 계속되다 보니 몸이 영 힘들어서 15.6km 떨어진 지점의 로르카(Lorca)에 숙소를 예약했다(보통은 이보다 8km를 더 가서 에스테야(Estella)에서 멈추곤 한다). 게다가 스페인 북부의 날씨는 예상보다 추웠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면 여지없이 찬바람이 불었고, 그건 기관지를 자극해 기침 증상을 더 악화시키는 듯했다. 어차피 뜨거운 날씨를 좋아하는 나로선 원래의 취향과 현재 몸 상태를 고려했을 때 해가 완전히 뜨고 난 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걷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로르카에는 한국인 순례자에게 유명한 장소가 한 곳 있다. 바로 ‘아이스커피’를 파는 곳인데, 유럽에서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가 당황하고 마는 ’미지근 커피‘가 아닌,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 ’아아‘를 파는 곳이다. 무려 한국어로 ’아이스커피‘라고 적혀 있는 메뉴판을 가진 이곳은 한국-스페인 부부가 운영하는 알베르게 데 로르카(Albergue de Lorca)다. 남편 사장님의 이름을 따 ‘호세 라몬의 집’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았다.
따뜻한 차와 커피, 호올스와 스트렙실로 기침을 가라앉히며 로르카에 도착했다. 한국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보셨는지 들어서자마자 아내 사장님이 어서 오라고, 수고했다고 한국말로 인사하며 맞아주었다. 먼저 샤워부터 하고 손빨래한 옷가지를 널어둔 후 배를 채우기 위해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바(bar)로 내려갔다. 아침부터 따뜻한 액체만 줄곧 마신 터였다. 때문에 배가 많이 고프진 않았지만 약을 먹기 위해 순례자의 애착 메뉴 급인 또르띠야를 주문했다. 메뉴판에 선명히 적힌 아이스커피도 마시고 싶었지만 건강을 위해 참아야지. 사장님도 아이스커피를 주느냐 물었지만 기침이 나서 따뜻한 차를 마셨으면 한다고 부탁드렸고 흔쾌히 차는 그냥 내주셨다. 더군다나 마트에 가서 티백을 좀 구매하려 했는데 주말이라 상점이 모두 닫았다며 민트티 티백을 여러 개 챙겨주기까지 했다. 그날 저녁에도 꿀과 레몬을 탄 차를 내주셔서 기침을 잡는 데 꽤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때뿐이었다. 그날 그 밤, 기침이 역대급으로 터져 나오는 바람에 나는 눕지도 못한 채 앉아서 잠을 청해야 했다. 그나마 전날 개인실을 쓰며 조금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도미토리 1층 침대에서 자다 보니 2층 침대 바닥 부분이 코앞에 있고, 여러 사람이 함께 쓰며 환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 보니 새벽 내내 기침이 걷잡을 수 없이 나왔다. 같이 방을 쓰는 프랑스 순례자에게 너무 미안해 아예 화장실에 가 한참을 있다가 기침이 조금 멎으면 다시 방으로 돌아와 앉은 채로 눈을 붙였다. 그래도 같은 방 룸메인 그 순례자가 오히려 나를 걱정하며 화장실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여주는 바람에 어찌나 미안하고 고마웠는지 모른다.
한국인 사장님은 기침으로 고생하는 나를 보며 남들처럼 20km씩 걸으려고 하지 말고 8km 거리에 있는 에스테야에 가서 며칠 쉬며 몸을 돌보라고 했다. 그래도 에스테야는 로르카보다는 인프라가 좋아서 약국도 여럿 있고, 순례자들도 하루 잠만 자고 떠나기 아쉬웠다는 후기를 많이 남기는 마을이었다.
다음날, 나는 사장님의 조언대로 에스테야까지만 걷기로 했다. 8km 거리니까 넉넉잡아도 3시간이면 도착할 것 같았다. 하지만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의 체크아웃은 대체로 이른 아침으로, 늦어야 8시 반일 정도다. 7시 반경 로르카를 떠나며 새로 잡은 숙소에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로르카에서 걸어가고 있어서 아마 체크인 시간인 1시보다 훨씬 일찍 도착할 것 같다고, 얼리 체크인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다행히 도착할 즈음 알려달라는 답장을 받았고, 나는 내 예상보다도 훨씬 이른 10시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그때부터 먹고, 약 먹고, 다시 숙소에 들어와 휴식을 취하는 사흘이 시작되었다. 약도 좀 더 강한 걸로 바꿨고, 호스트에게 부탁해 소금도 얻었다(소금물 가글을 하면 기침 완화에 도움 된다고 들었기 때문).
처음 하루는 꽤 좋았다. 사실 순례길을 걸으면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지라 오후 2시면 숙소에 도착한다. 그래서 남은 하루가 길기 때문에 취미 생활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지만 나는 휴대폰에 가득 채워온 전자책을 한 자도 읽지 못했다. 그렇다고 유튜브나 인스타라도 많이 접속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먹고 쉬고 자고 유튜브/OTT 시청하고…의 반복이 처음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금세 지루해졌다. 하지만 에스테야에서 잠시 걷기를 중단하고 며칠 묵으려 한 목적이 바로 지루함이지 않았던가. 그저 먹고, 자고, 쉬려는 것, 바로 완전한 휴식.
휴식이 쉽지 않은 건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골골대는 바람에 가뜩이나 느린 속도가 더 느려진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순례자 사무소에서는 32일 혹은 33일을 걸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도착하는 일정표를 주었다. 나는 최소 40일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일정을 넉넉하게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뒤처지는 느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50일이 지나도 다 못 걷는 거 아니야? 끝나고 주변 국가 여행도 하려고 했는데 여행은커녕 죽어라 걷기만 하다가 한국 가는 거 아니야?
온전한 휴식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낮에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다 보면 이런 생각들이 날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애초의 목적을 잊지 않으려 그야말로 부단히 노력했다. 밥때에 맞춰 일어나 식당에 가 배를 채운 후 약을 먹고 바로 숙소에 돌아왔고, 해가 쨍한 때가 아니면 간단한 산책도 하지 않고 바로 숙소에 머물렀다. 수시로 따뜻한 차를 마셨고, 소금물 가글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사흘 간의 휴식에도 기침은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내 몸은 단지 휴식을 원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명확한 원인을 찾기 위해, 궁극적으로 순례길을 이어가기 위해 병원에 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