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목적지를 2km 남기고 짐을 풀었다
콜록콜록. 금방 괜찮아질 줄 알았던 기침이 약을 먹어도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시작은 독일이었다. 나는 순례길에 오르기 전, 오랜만에 오는 유럽인지라 다른 사심을 채우기 위해 네덜란드와 독일엘 들렀다. 그전엔 에티하드 항공을 이용한 덕에 아부다비에서 2박 스탑오버도 했다. 한국의 초여름을 지나 실제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아부다비에서 3분만 걸어도 휴대폰이 터질 듯한 더위와 건물만 들어가면 에어컨 바람에 서늘해지는 시원함을 오간 뒤, 네덜란드에서 다시 한국과 같은 더위를 경험했다. 그런데 독일은 달랐다. 별안간 비가 오더니 아침 기온이 15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갑자기 추워진 탓일까, 그때부터 기침이 시작됐다.
한국에서 가져온 종합감기약을 먹고, 독일에서 기침을 완화하는 약을 또 사 먹었다. 기관지에 좋다는 사탕도 줄곧 입 안에 넣고 굴렸다. 그런데 좋아질 듯하더니 콧물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순례길까지 이어지면 안 되는데, 싶었는데 웬걸, 순례길 시작 1주일이 지났는데 증상이 전혀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스페인에서만 구입한 약이 총 네 종류였다. 거기다 팜플로나에서 술도 마시고 아이스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환호하며 스타벅스도 여러 번 들르고 아이스크림도 좋다고 먹었다. 도시에서의 먹부림이 증상을 악화시킨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걷지 않을 순 없다. 팜플로나에서 하루를 더 묵은 후 예정대로 길을 나섰다. 순례자 사무소의 추천 루트는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까지 22km다. 바로 직전 구간인 수비리(Zubiri)에서 팜플로나(Pamplona)까지가 21.8km였기에 웬만하면 22km를 걸으려는 마음을 먹었다.
팜플로나에서 걷기 시작하면 초반에 꽤 높은 언덕길을 만난다. ‘용서의 언덕’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철제 조형물이 세워져 있고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데다가 지대가 높아 바람이 잘 불어 많은 순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쉬어가기도 한다. 사실 혼자 걷다 보니 사진 찍는 일이 쉽지 않지만, 용서의 언덕에서의 분위기를 보면 쉬이 부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팜플로나 전후로만 해도 사진 촬영을 부탁받고 그 답례로 내 사진도 한 장 남길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 뒤로는 대체로 많은 순례자들이 걷기에 집중하는 듯하다. 나는 운 좋게 보르다에서 만났던 한국인 순례자를 용서의 언덕에서 재회해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수비리까지 동키 서비스를 이용한 지라 그날이 두 번째로 배낭을 메고 걸은 날이었던 우리는 “뒷모습 찍어 줘요. 언제 또 배낭 보낼지 몰라“라며 커다란 배낭을 거북 등딱지처럼 지고 있는 서로의 모습을 열심히 찍어주었다.
반가운 재회를 했으니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우테르가(Uterga)라는 작은 마을에서 점심도 먹었다. 그런데 용서의 언덕을 내려와 뜨거운 볕 아래 있는데도 기침이 계속 나왔다. 용서의 언덕에서도 다들 시원하게 바람을 맞는 와중에 나만 추워했었다. 사실 걷다가 영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점심을 먹은 그 마을, 우테르가에 짐을 풀 생각이었다. 우테르가에 있는 순례자 숙소 알베르게는 단 두 곳이었는데, 그중 한 곳은 영업을 하지 않는 상황이라 한 곳만 예약이 가능했다. 전날 밤만 해도 15개가량의 침대가 있는 해당 숙소에 나 하나 받아줄 자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다만 그 숙소가 너무 어둡고 침침해서 순례자들의 공포인 배드버그(빈대)가 나올까 두려울 뿐. 식사를 함께한 한국인 순례자에게 이러한 얘길 하니, 그는 마침 잘 됐다며, 자신은 너무 힘이 들어 이곳에서 오늘 하루를 묵어야겠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쾌적한 숙소를 위해 조금만 더 걸어야겠다며 그 자리에서 오바노스(Obanos)의 개인실을 예약했다. 원래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보다 2km를 덜 가는 지점이었다.
“어머, 어떡해! 지금 이 마을 알베르게 풀부킹이래요!“
그런데, 식당 건너편에 위치한 알베르게에 가겠다던 그가 화들짝 놀라며 이젠 그 숙소에 자리가 없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러더니 내가 예약한 숙소가 어디인지 묻는다.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 숙소명을 확인하는데 웬걸, 내가 예약할 때만 해도 여유 있던 더블룸과 싱글룸이 예약 가능 옵션에서 하나씩 사라져 있다. 결국 그는 나와 같은 숙소의, 나보다 10유로 더 비싼 방을 잡았다. 용서의 언덕을 넘으며 다들 더 힘을 내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가지 못하는 스스로를 용서한 모양이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이층침대가 가득한 호스텔형 알베르게도 있지만, 가정집 분위기의 숙소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주로 스페인어로 집을 의미하는 ‘Casa’라는 말을 달고 있는 숙소들이 그렇다. 오바노스에서 묵은 숙소도 그런 형태였다. 순례자들이 주로 쉬어가는 마을이 아니다 보니 손님도 몇 명 없었고, 순례자 손님은 나와 또 다른 한국인 순례자 둘 뿐이라 저녁 식사도 둘이 오붓하게 할 수 있었다. 식사 전엔 슈퍼에 가서 물도 사고 커피라도 한 잔 하자며 동네를 한 바퀴 돌았는데, 주말이라 슈퍼는 모두 닫았고 작은 바 하나만 열려 있었다.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 잘 안 오는 작은 동네에서 멈추니 순례길 같지 않고 꼭 여행하는 것 같다며 둘이 깔깔 웃기도 했다.
우테르가에서 식사를 할 때 인사를 나눈 순례자에게 우리는 다음 마을에서 쉬려고 한다고 말하니, 2km만 더 가면 좀 더 인프라가 좋은 마을이 나오는데 더 가지 그러느냐는 대답을 들은 터였다. 물론 작은 동네가 주는 불편함이 있다. 하지만 순례자가 별로 없는 마을에서 느끼는 평안함과 안온함이 분명히 있었다. 게다가 그날은 같은 숙소에 묵은 순례자와 함께 방을 쓴 것이 아니라 각각 예약했기에 순례길 시작 후 처음으로 개인실을 사용하며 각자 조용하고 편안하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마침 나는 밤이 되면 기침이 더 심해졌기에 따로 방을 쓰는 게 어찌나 다행이던지. 편안한 와중에도 이놈의 기침은 자꾸만 나를 성가시게 했다. 약효가 좀 들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날밤도 호올스 사탕 하나를 물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