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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싸, 오늘 걸으면 하루 쉰다!

ep4. 팜플로나, 도시의 맛

by 양탕국


순례길을 걷다 보면 대략 1주일에 한 번 정도 대도시를 만나게 된다. 생장(Saint-jean pied de port)에서 프랑스길을 시작했다면 팜플로나(Pamplona)는 처음 만나는 도시다. 부지런히 오면 3일 만에도 오는 이곳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하루 쉬어간다. 나는 생장에서 이틀을 묵고 피레네 산맥도 이틀에 걸쳐 올랐기에 생장에 온 지 닷새만에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이날은 내가 처음 배낭을 메고 걸은 날이었는데, 한국에서 올 때 8.5kg이었던 배낭은(그 이후로 무게를 재지 않았다. 바지와 신발을 하나씩 버렸지만 우비가 생겼고 물을 500ml에서 1l씩 넣고 다니니 무게 변화가 클 것 같지 않다) 몸에 착 붙는 방식으로 올바르게 메니 예전에 배낭여행을 했을 때처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물론 이전에는 10.8kg으로 시작해 12kg을 넘겼었던 탓도 크지만, 그땐 제대로 메는 법을 몰라서 오로지 어깨로 모든 무게를 짊어졌었다.

순례자 사무소에서 받은 안내문에는 각 구간의 경사도가 그림으로 나타나있는데, 그에 따르면 수비리(Zubiri)부터 팜플로나까지는 비교적 평이했다. 거리는 21.8km. 배낭을 지고 걸어야 하니 꽤 피로하겠지만 팜플로나에서 하루 쉬어갈 테니 좀만 힘내자는 마음으로 아침 7시 40분경 길을 나섰다.

각 구간의 경사도 안내문. 수비리-팜플로나 구간은 3번째.

순례길 4일 차가 되니 ‘순례 루틴’이 생긴다. 순례길을 준비하며 대문자 P 여행자인 나도 경험자들의 조언을 열심히 읽고 준비하게 됐다. 그러다 보면 ‘걷다가 먹을 간식이 있어야 한다’, ‘쉬어갈 바bar가 나오면 무조건 화장실을 이용한다‘ 같은 여러 팁을 알게 된다. 그러나 막상 걸어보니 나는 간식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보통 출발 후 2시간은 걸어야 바가 나오지만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하는 유형도 아니었다. 그래서 생장에서 산 6개짜리 에너지바는 정확히 6일 치 아침으로 먹었다. 따뜻한 차 혹은 커피 그리고 에너지바 하나. 이렇게가 나의 아침. 혹시 해서 사둔 당 충전용 젤리는 하나도 먹지 않아서 한국인 순례자에게 주었다. 한국에서도 젤리 안 먹는데 순례길에서 갑자기 먹을 리 없다. 오히려 평소에도 좋아한 초콜릿은 마을에 도착한 후 마트에서 물과 필요한 것들을 살 때 하나씩 사서 그때그때 까먹었다.

그러나 대문자P형인 내가 엄청나게 꼼꼼할 리 없다. 아침을 안 먹는 대신 마을에 도착한 후엔 마음이 편해져서 점심이나 저녁은 잘 먹자는 주의인데, 수비리 알베르게의 커뮤니티 디너(알베르게에서 준비해 주는 식사로, 순례자들과 함께한다)가 너무 좋다는 평이 있어 예약했지만 여름 시즌에는 식사가 없단다. 일부러 이것 때문에 순례길에서 10분이나 떨어진 곳의 알베르게를 예약했는데,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탓에 그냥 잠만 자고 나왔다. 그 외에도 보르다에서 론세스바예스로 향하는 7시간 남짓 거리에 화장실이 하나도 없다는 정보도 5시간쯤 걸어가서야 다른 순례자에게 들어서 알게 됐다. 그때부턴 목도 안 마르더라.

제일 밑에 반가운 한국어(좌), 얼음 동동 띄운 콜라는 꿀맛(우)
21.8km 걸어 팜플로나 입성! 도시의 순례길 표식은 보다 정돈된 모양

팜플로나에 들어서자 순례길 표식부터 그 형태가 다르다. 그동안 보아온 것 중 가장 깔끔한 건 이정표에 그려진 형태였다. 산길로 들어서자 노란 페인트로 바닥이나 바위, 나무에 화살표를 그려놓은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도시에 들어오니 보도블록 위에 정갈하고 반듯한 파란 네모가 그려져 있고 그 안에 노란 화살표와 가리비가 있다. 심지어 보도블록 위에 가리비 모양 조각이라고 해야 할까, 양각으로 튀어나온 모형들이 세 걸음마다 하나씩 박혀있는 듯하다.

도시의 깔끔함에 반할 준비를 잔뜩 하고 숙소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확인하기 위해 구글맵을 켠다. 그리고 그 순간, 도시에 정 붙이려는 마음가짐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생장부터 론세스바예스까지는 피레네 산맥길이었으니 예외로 하고, 바로 이전에 머문 수비리는 ‘와, 마을이다!’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팜플로나는 도시 아니랄까 봐 사람들이 복작대는 모습을 이미 봤는데 여기서 한 시간을 더 걸어야 순례자 숙소가 밀집한 구역인 대성당이 나온단다. 더군다나 나는 순례자 숙소가 아닌 사립 호스텔을 예약한 터라 대성당과 요새가 자리한 구시가지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차가 쌩쌩 지나가는 차도 옆 인도만 내리 한 시간을 걸어야 했다. 나중에 보니 순례자들이 주로 향하는 대성당 구역을 통해 내가 예약한 숙소에 당도하는 방법도 있었는데, 8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7시간 가까이 걸어온 터라 어서 이 짐에서 해방되고픈 마음뿐이었다. 즉, 굳이 구경을 위해 돌아서 가는 길을 택할 체력 따윈 없었다는 얘기다.

팜플로나 대성당. 원래 5유로인 입장료가 순례자는 3유로
스타벅스 커피와(좌) 시끌벅적 타파스 바(우)

팜플로나는 재미있는 곳이다. 골목이 정말 많은데(심지어 구글맵이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할 정도!) 그 골목마다 작은 상점들이 빼곡하고 각각의 특색이 있다. 순례길을 걷는 게 아니었다면 하나씩 들어가 유심히 구경하고 가방을 두둑이 채웠을 수도 있지만, 순례 나흘 만에 쇼핑에 흥미를 갖지 않는 자세를 체득했다. 사실 아이쇼핑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이건 어쩔 수 없는 체력 이슈다.

그래도 순례길 시작 후 구경할 수 없었던 도시의 먹부림은 실컷 즐겼다. 이틀을 머무는 동안 스타벅스를 세 번이나 갔고, 무려 미슐랭 별을 받은 타파스 바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며 맥주도 한 잔 하고, 과자를 꽂은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다. 그리고 정말 기대했던 것은 바로 마스크팩을 사서 종일 걷기로 뜨거워진 내 얼굴을 달래줄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스페인의 올리브영 같은 Primor에 가니 마스크팩은 ‘한국 화장품 코너’에 가야 있다고 한다. 덕분에 스페인에서 한국 로드샵 마스크팩을 구매했다. 그리고 이틀 머무는 동안 야무지게 매일 팩을 하고 남은 걸론 발팩까지 해줬다! 더 구매하진 않았다, 모든 게 내 짐이 될 테니까. 마스크팩은 다음 도시가 나오는 1주일

후에 만나는 걸로.

팜플로나를 빠져나가는 길에서 흔히 보는 표식


그리고 잘 쉬었다고 생각하고, 이틀을 보낸 후 처음으로 일출 시간에 맞춰 길을 나섰다. 날은 쌀쌀했지만 일찍 움직이니 많은 순례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땐 몰랐다, 내가 신나게 즐긴 먹부림이 이후의 내 컨디션에 악영향을 미쳤을 줄은. 순례길 시작 후 처음 만난 도시에 너무 즐거웠던 모양이다. 막상 걷다 보니 팜플로나는 엄청 아담한 곳이었는데 말이다. 부디 순례길 걸으시는 분들은 자신의 컨디션을 살피며 적당히 놀고먹고 즐기시기를 바란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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