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안개 낀 피레네 산맥을 걸어서 넘다
생장(Saint-Jean pied de port) 숙소에서 8시 반에 체크아웃을 했다. 호스트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 보르다(Borda)까지 간다고 하니, 우리 숙소는 10시 체크아웃인데 왜 이리 일찍 떠나느냐고 묻는다. 보르다까지는 약 9km. 헬스장 러닝머신으로는 1시간에 4km 정도를 걸었으니 2시간 반 정도면 되려나 싶다가도 순례길 경험자들이 피레네 산맥길을 걷는 첫날 혹은 둘째 날까지가 가장 힘들다 했는데 4시간은 잡아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을 고쳐먹는다. 전날 저녁 비가 왔는데 아침까지도 여전히 흐리고 습하다. 산길을 걷다 비라도 오면 첫날부터 이 길에 지치는 것 아닐까 걱정이 된다. 차라리 일찍 떠나는 게 맘 편하지. 그리고 순례길 첫날이라 내가 얼마큼의 속도로 걸을지, 내 체력은 어떨지 가늠이 되지 않으니 호스트 말대로 체크아웃 시간까지 숙소에 머무르기가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저질 체력에겐 필수로 여겨지는 동키 서비스(가방을 다음 숙소까지 옮겨주는 짐 운송)를 신청했기에 크로스백에 지갑과 여권, 크레덴시알(순례자 여권), 보조배터리, 에너지바, 물 500ml를 넣고 출발했다. 파리에 있는 데카트론에서 구입한 등산 스틱과 우비까지 모두 챙겼다.
가리비 표식은 단순하게 그림과 화살표로만 나타나기도, 때론 이정표에 장소명과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정말 다양한 형태의 표식을 보았는데, 그저 바닥이나 나무에 노란 페인트로 그려진 화살표가 전부일 때도 있다. 그럴 땐 구글 맵과 까미노 어플을 열어 내가 가는 길이 올바른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걷는다. ‘혹시 악의를 품은 자가 일부러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그릴 가능성도 없진 않잖아?’ 하는 맘으로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자세를 견지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노란 화살표가 잘못된 방향을 가리킨 적은 없었다.
첫날은 계속 오르막을 걸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아스팔트길이 이어질 거라고. 순례자 사무소의 봉사자는 산길이나 숲길보다는 힘들 수 있지만 그래도 길이 잘 닦여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워낙 단단한 시멘트 길이라 다리에 무리가 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곧 알게 되었다. 아스팔트 길은 아주 감사한 길이라는 것을.
봉사자가 언급한 대로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마을을 벗어나 산으로 접어든 후에도 계속 오르고 또 올랐다. 등산 스틱이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까 했지만 없이 걸으니 어찌나 힘든지. 생전 처음 써본 스틱의 효과는 대단했다. 순례자들이 찾는 네이버 카페에선 스틱이 걸을 때뿐 아니라 갑자기 마주친 들개를 쫓아낼 때에도 아주 유용하다고 했다.
별로 높은 오르막도 아닌데 평지가 나오질 않고 계속 올라가기만 하니 곧 숨이 턱끝까지 찬다. 가뜩이나 감기까지 걸려서 기침이 나고 숨이 달리는데, 이거야 원, 초입부터 이래서 피레네 산맥은 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역시 생장 숙소 호스트가 10시에 출발해도 3시간 뒤면 도착할 거라던 말을 뒤로 하고 일찍 출발한 건 좋은 결정이었어. 숨을 헥헥대며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 또 한 발짝 걸어갈 힘을 얻는다.
나보다 늦게 출발했을 사람들이 휙휙 나를 앞서 나간다. 아직은 서로 ‘봉쥬르 Bonjour” 혹은 “하이 Hi” 정도의 인사를 건네며, 종종 괜찮으냐 안부를 묻고 이따 보자며 마무리를 한다. ’부엔 까미노 Buen Camino’는 아직 입에 붙질 않았다. 내 뒤에서부터 성큼성큼 걸어와 날 앞지른 미국인 할저씨 둘(위 두 사진 중 오른쪽 사진에서 보이는 뒷모습의 주인공)은 1시간 반 뒤 쉼터에서 다시 만나고, 그날 밤 같은 알베르게에 머물렀다.
약 3시간가량을 걸어 오리손(Orisson) 산장에 도착했다.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와 음식점을 같이 운영하는 곳이다. 내가 묵을 보르다 알베르게와는 약 30분 거리. 상그리아 한 잔을 주문하고 땀을 식혔다. 그러나 순례 중 알코올 섭취는 이 날 이후로 하지 않는다. 저녁 식사할 때 와인이나 맥주를 한 잔 정도 하고 있는데, 몸이 힘들다 보니 금세 취한다. 때문에 오늘의 걷기가 끝나지 않으면 술은 가급적 입에 대지 않기로 한다.
보르다 알베르게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후 여정에서도 종종 만났다. 다만 유럽인인 이들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걷는 이들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1주일 정도의 코스를 걷고 이후에 이어 걷는다고 했다. 얼핏 듣기론 멈추었던 곳에서 다시 걷고, 또 이후에 다시 시작해서 산티아고에 도착해도 완주증서를 받을 수 있단다.
보르다에 도착해서부터 미스트 흩뿌리듯 비가 오고 안개가 가득해 걱정이더니 다음날 역시나 안개가 뿌옇다. 생장에서 보르다에 올 때는 약간의 안개가 있고 비가 올 기미가 보였을 뿐 시야는 확보되고 정작 비는 내리지 않았는데 기상이 더 악화된 거다. 볕이 너무 쨍해서 더위 먹을 정도라는 여름 순례길에서도 피레네 산맥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이 변화무쌍하다더니, 이렇게까지 안 좋은 건 생각 못했는데. 온몸을 덮는 판초 우의를 입고 길을 나선다.
안 그래도 심각한 길치에 방향치인데 심한 안개로 시야 확보도 되지 않다 보니 길을 찾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보르다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국인 순례자와 함께 걸었는데, 문제는…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심각한 길치라는 것. 심지어 잘못된 길로 1km 이상을 가고 있는데 한 청년이(그 역시 잘못 간 길을 되돌아오는 중이었다) 이 길이 아니라며 돌아가라고 알려주는 덕에 바로잡을 수 있었다. 키가 크고 다리가 무척 길었던 그는 길만 알려주고 안갯속으로 사라져 마치 천사인가 싶을 정도였다.
여름에 온다고, 비가 덜 내리는 계절이라고 피레네 넘는 날까지 맑을 거라는 기대를 했더랬다. 설령 산 위의 날씨가 변덕스럽다 해도 내가 걷는 날엔 힘들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근자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내게만 행운의 여신이 따라붙을 리 없다. 사실 알고 보니 내가 피레네를 넘던 날보다 하루 이틀 빨리 혹은 늦게 시작한 사람들은 피레네의 날씨가 좋아서 저 아래 경치를 굽어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여신님, 그냥 제가 걷는 날은 의도적으로 피해 가신 것 아닌가요?
그래도 도착 한 시간 전쯤부터 계속되는 내리막을 따라 쭉 걷다 보니 산에서 내려와서인지 날씨가 전반적으로 맑아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안개가 사악 걷힌 청명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이 예쁜 걸 산 위에서 조망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운도 없지. 그래서일까, 보르다 알베르게 호스트가 “너희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일단 가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지 않을 거야. 너흰 또 이곳에 오게 될 거야“ 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나는 맑은 날의 피레네가 보고 싶어 언젠가 다시 배낭을 꾸리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