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 병원에 가기 위해 ‘점프’를 감행하다
이른바 ‘기침 이슈’를 3회 차에 걸쳐 작성하는 이유부터 밝히고자 한다. 사실 순례길을 걷는 중 병원이나 보건소에 다녀온 후기는 검색을 해 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 여행자 보험을 통해 진료비를 받은 후기까지 야무지게 작성한 글도 꽤 여럿이다. 앞으로 이어질 내 글의 내용도 그중 하나의 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급적 구체적으로 적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순례 도중 병원에 간 후기의 대부분은 다리와 발 부상 때문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처럼 기침이나 기관지 증상으로 인한 병원 방문 후기는 좀처럼 없었던 터라 아주 일부에게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본격적인 내용을 적기에 앞서 밝혀본다.
앞선 글에 이야기했듯이 나의 기침은 여러 가지 약을 먹고(한국, 독일, 스페인의 감기약을 고루 먹었으며, 늘 이전에 먹던 약을 약사에게 보여주며 이보다 더 효과적인 약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즉, 단계적으로 강도를 높여가며 거의 3주 동안 약을 복용한 것),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소금물 가글과 따뜻한 차를 줄곧 마셨지만(일명 ’감기차‘라고 불리는 것도 마셨지만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도저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약을 너무 오랫동안 먹은 탓인지 오히려 사흘간 먹고 자고 누워있는 요양 생활을 했음에도 늘 몽롱하고 기력이 달리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항생제 복용 정도는 해야 나을 것 같았는데, 이건 약국에서 구할 수가 없으니 병원이나 보건소를 방문해야 했다.
순례길 중 만나는 마을은 대체로 관광지가 아닌 작은 마을이기에 약국이 없는 곳이 허다하다. 그래도 보건소는 최소 하나씩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구글 지도에 ‘centro de saúde’를 검색하면 근처에 있는 보건소를 확인할 수 있다). 순례길 중, 혹은 스페인에서 보건소를 방문한 후기를 찾아보니 여행자 보험이 있으면 보건소 진료비가 무료라는 글이 꽤 많았다. 그래서 보건소를 갈까 하다가 이내 병원을, 그것도 이비인후과를 가기로 결심했다. 나의 증상은 발이나 다리 부상처럼 가시적인 것이 아니기에 보건소에서도 이제껏 여러 약국을 전전하며 그러했듯이 말로 증상을 설명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보건소에도 목이나 코 안을 볼 수 있는 내시경 장비 등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비인후과엘 가면 확실하게 내 목과 코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 사흘째 에스테야(Estella) 숙소의 침대에 누워있던 난 구글 지도에 이비인후과를 검색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구글 지도에 따르면, 내가 머물고 있는 마을인 에스테야엔 이비인후과가 없었다. 가장 가까운 이비인후과는 35.5km 떨어진 팜플로나(Pamplona)에 있었고, 이곳은 내가 이미 며칠 전 지나온, 신나게 술과 스타벅스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마시며 기침 증상을 악화시킨 곳이었다. 그다음으로 40km가량 먼 거리에도 이비인후과가 있었는데, 그 마을은 보통의 순례 루트에 따르면 에스테야에서 49km 떨어진, 걸어서는 이틀 후 도착하는 로그로뇨(Logroño)였다. 당시 내 몸 상태로는 하루에 20km씩은커녕 10km도 걷기 어려웠다. 정말 기침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탓에 배낭끈을 단단히 고정시킨 골반과 어깨까지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점프’를 하기로 결정했다. 즉, 에스테야에서 로그로뇨까지의 이틀 치를 걷지 않고 교통수단을 이용해 이동하기로 한 것이다.
스페인의 시간은 보통의 한국인의 시간과는 다르게 흐른다. 이 글을 작성하는 지금은 순례길 막바지인데, 나는 아직까지도 스페인의 식사 시간을 맞추는 게 너무 어렵다. 아침엔 카페에서도 시판 빵과 또르띠야만 팔고 점심이 되어야만 주방이 열리는 것도 적응하지 못했다. 그런데 버스 터미널도 마찬가지였다. 에스테야에서 로그로뇨로 넘어가는 버스를 타는 정류장은 관광 안내소와 한 건물을 쓰고 있었는데; 무려 오후 1시 반에 창구가 열렸다. 그래서 인터넷 예매를 하려고 보니 매표소에서 직접 사는 것보다 더 비쌌다. 결국 한 번은 허탕을 치고 창구가 열리는 시간에 맞춰 표를 구매했다. 5유로가 조금 넘는 금액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약 20km 거리의 마을로 가방만 옮기는 게 6~7유로인데, 49km 거리를 이동하는 버스표값이 그보다 저렴하다.
순례길을 걷고자 했을 때 이렇다 할 목적이나 큰 이유는 없었지만, 그저 다치지 않는 한 끝까지 걸어보자는 마음만 갖고 왔다. 기침도 부상의 일종이라고 보아야 할는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점프를 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이르게 그 시점이 찾아왔다.
순례길을 걸으면 차를 타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들게 된다. 온전히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정한 순례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 ‘현타’가 올까 봐 차를 타는 일을 두려워했다. 첫날부터 셋째 날까지 배낭 배송을 보내면서도 가끔 어느 후기에서 보았듯 내 배낭도 배송 사고가 나서 배달이 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겁이 들었다. 만약 오늘의 숙소에 내 가방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이전 숙소에 그대로 놓여 있다면 나는 교통수단을 이용해 내가 수 시간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걸어선 6시간이 걸리는 길을 20분 만에 주파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까 봐 배낭 배송 사고가 발생하지 않길 간절히 바랐었다.
로그로뇨에 가는 날도 걸어선 이틀이 걸릴, 걷는 시간만 따지면 족히 13시간은 소요될 거리를 58분 만에 간다는 사실에 현타가 올까 겁이 났다. 게다가 약간의 자책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마음도 없진 않았던 것 같다. 이왕 시작한 거 770km 싹 다 걸으면 얼마나 좋게요~ 그런데 막상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그런 생각은 쉽게 사라졌다. 커다란 배낭에 가리비 껍데기를 매달고 기다란 스틱을 짚은, 누가 봐도 순례자인 이들이 버스 터미널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각국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순례자들을 가만히 지켜보니(마스크를 쓰고 있던 탓인지 아무도 내 곁에 오지 않았으므로 멀찍이서 관찰했다) 다들 다리가 아프고 무릎이 아프고 무슨 이유들이 있어서 점프를 하는 듯했다.
기침만 아니었다면 걸어서 지나갔을 마을의 이정표와 순례길 표식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배낭을 짊어진 채 걸어가는 순례자들을 휙휙 빠르게 지나치며 버스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에스테야에서 49km 떨어진 로그로뇨에 도착했다.
기침이 멈추지 않으니 역시나 개인실로 체크인. 일단 짐을 풀고 숙소 근처 이비인후과를 검색했다. 미리 알아둔 도보 7분 거리 이비인후과는 오후 4시에 문을 열었다. 그날은 목요일이었는데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진료를 보지 않았다. 이런 게 진정한 프리랜서가 아닐까 생각하는 ‘상근직 프리랜서’라는 요상한 형태의 근무를 자주 했던 프리랜서인 나. 그렇게 뒹굴대다가 병원 오픈 시간 10분 전에 도착했다.
구글 평점 4.7에 빛나는 이비인후과는 정말 친절했는데, 의사 선생님에게 엄지 척을 받은 나의 이비인후과 방문을 위한 준비물은 다음과 같다. 1) 영어와 스페인어로 내 증상을 구체적으로 적어 준비한다. 특히 언제 증상이 시작했고 현재는 어떠하며, 무슨 약들을 먹었고 차도가 있었는지 등에 집중하여 작성했다. 2) 여행자보험비 청구를 위한 서류 작성에 필요한 신분증과 내가 사는 곳의 정확한 주소. 처음에 접수처 직원이 수기로 작성해 달라고 했는데, 알아보기가 힘들어선지 오타가 나더라. 그래서 이것도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서 보여드렸다. 3) 여행자 보험 관련 서류. 접수처에서 처음에 영어로 된 보험 서류를 달라고 하는데, 보장 항목 등이 적힌 서류를 가져가서 건넸더니 그게 아니라고 했다. 다른 후기들을 보면 영문 서류를 주면 환자에게 진료비를 청구하지 않고 보험사에 직접 청구한다고 들었다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적절한 서류가 없었기에 진료비 영수증, 처방전 등 받을 수 있는 서류는 다 받았다.
내 기침은 감기 때문이 아니라 코에 생긴 염증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항생제를 복용하고 꾸준한 코세척과 스테로이드성 스프레이를 뿌려 관리하면 금방 호전될 거라는 이야길 들었다. 내 증상이 나아지지 않으면 어떤 방법이 더 필요한지, 마스크를 쓰는 게 나은지, 순례길을 걷는 정도의 피로가 누적되어도 괜찮은지 등 여러 질문 역시 스페인어와 영어로 준비해 갔는데, 이에 대한 답도 모두 친절하게 영어로 들을 수 있었고, 약 복용과 사용법도 내가 잊을 수 있으니 참고하라며 영어로 따로 적어서 챙겨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진료 시간만 30분 정도 소요됐는데 진료비는 100유로가 나왔고, 약국에서 지불한 비용은 50유로가 좀 안 됐다. 배낭에 있는 짐을 덜어내도 모자랄 판에 손보다 큰 코세척통을 얻었지만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그렇게 로그로뇨에서 연박을 하며 드디어 몸이 호전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됐고, 현대미술이 가득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도 다녀오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이틀 뒤, 나는 에스테야 3일-로그로뇨 2일 총 5일간의 쉼 끝에 다시 배낭을 메고 길 위에 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