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사는 집 11> 내겐 너무 과분했던 한 사람에게 바친다
어느 외국 여성 사회학자가 쓴 글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요즘 남자들은 완벽한 꼰대 혹은 쿨한 척하며 정작 책임은 회피하는 소년들로 양분되고 있는 것 같다”
음, 다소 과격한 표현이긴 하지만 작가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짐작은 간다. 그만큼 작가 자신이 남성 중심 조직에서 제대로 데었고, 그에 대한 비판으로 이 책을 서술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대목을 보고 잠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음…, 1950년생인 우리 아빠는 과연 어떤 남자로 분류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아빠를 ‘어떤 남자’라는 분류에 넣어본 적이 없다. 50년대생 아빠를 가진 친구들이 “우리 아빠는 진짜 본인 생각만 강요하는 꼰대야” 혹은 “집안일 따위엔 전혀 관심 없는 개인주의 자지”라고 말할 때도, 딱히 아! 하고 공감을 한 적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아빠는 내가 아는 한, 늘 주위 사람들에게 주파수가 맞추어져 있는 아주 인간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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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가정적이었다. 우리 집은 외식이 잦았는데 아빠가 퇴근을 하면 우리를 늘 밖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내가 이 집에서 먹어보니 아주 맛있었어” 라며 오징어순대를 사준다거나, “너희들 새로 생긴 메뉴 먹어봤니?” 하며 당시엔 좀 파격적이었던 경양식 세트(돈가스, 생선가스, 함박스테이크가 한 그릇에 있는)를 먹으러 가기도 했다. 아빠의 이런 배려는 주로 엄마를 향한 것이었는데, 가뜩이나 좁은 집에서 하루 종일 부엌을 지킬 엄마가 안쓰러워 그런 거였다.
물론 우리에게도 그 관심이 빠졌을 리 없다. 주말엔 정말 엄마 아빠와 미친 듯이 놀러 다녔다. 돌이키면 집에 차도 없었는데, 산, 바다, 계곡, 국립공원 등 전국구로 놀러 다녔다. 주중에도 아빠가 퇴근을 하면 온 가족이 과일을 함께 먹으며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눴다. 결혼하기 전, 잠시 온 식구가 2년 정도 모여 살 때도 (부모님이 청주에서 서울로 올라오셔서) 아빠는 우리의 연애상담을 하고, 우리의 옷을 다림질해 줄 정도로 딸내미들을 살뜰히 챙겼다."아 이런 거 하지마"라고 핀잔을 하면 특유의 말투로 구수하게 받아쳤다. “결혼하면 만날 이런 거 할 텐데 뭐. 그때까진 아빠가 도와주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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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따뜻했다. 엄마에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에 셋이나 있었는데 모두 자리를 잡고 결혼을 할 때까지 아빠가 다 건사를 했다. 요즘 상식엔 나쁜 말로 ‘혹’ 일 수도 있는데, 딱히 싫은 티를 낸 적도 없다. 덕분에 아직도 우리와 외가댁과의 관계는 ‘가족 그 이상’으로 정말 끈끈하다. 아빠가 일구어 놓은 덕이 우리에게 울타리가 되어준 거다.
비단 가족에게뿐만 아니라 직장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집에는 아빠의 직장 후배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주로 고학을 했거나 직장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업무나 인간관계 등) 어린 맘에도 “떡고물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밥을 먹이면서 상담을 해주나”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분들 역시 아빠의 장례식장까지 다시 찾아왔고, “정말 자상하고 실력 있는 상사였다”며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아빠가 은퇴한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던 때라 직장 후배들이 찾아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참 의외였다. 그리고 그만큼 아빠의 인품이 증명된 것 같아 마음이 푸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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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만큼 베푼다”는 말이 있지만, 때론 굉장한 것을 받지 못해도 베푸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아빠의 외로웠던 성장배경을 생각하면 누군가에게 한 없이 베푸는 것이 쉽지 않은 일 같은데, 이 모든 사람들을 보듬고 챙겼다는 것이 가끔은 참 기적처럼 느껴진다.
특히 결혼을 한 후에는 더 그러했다. 결혼 후에 크고 작은 부부싸움을 하면서, 우리 집엔 어떻게 그 흔한 싸움이나 막말 한 번이 없었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중심엔 늘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싸움이 나려고 해도 “으이그” 하고 자리를 피한다거나, “거 사람이 왜 그리 맘이 좁아?”하며 밉지 않게 되받아 쳤다. 그런 의미에서는 확실히 내가 현실 남자와 살고 있는 것 같은데, 가끔 남편에게 이러저러한 게 불만이 있다 말하면, 그 역시도 허허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그런 걸 자꾸 말하지 말고, 네가 양보해. 그냥 내 잘못이오 하고 말하면 그런 싸움은 그냥 지나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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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유난히 가을을 좋아했는데, 이 단풍이 가득한 거리를 함께 걷지 못해 더 쓸쓸하다. 그래도 가끔 아빠가 담긴 사진이나 영상을 바라보면,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 위안을 받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아빠가 엄청난 명예나 사치를 누리진 못했지만 참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나 아빠를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그것이 거짓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이라서.
마지막으로 아빠는 흥이 많았다. 그만큼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참 긍정적이었다. 조금만 기분이 좋아도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을 흥얼거리던 아빠가 생각난다. 가사는 별로 밝지 않은데, 이 노래를 기분 좋을 때마다 흥얼거렸다는 게 좀 신기하다.
“안개 낀 장충단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 가면서 떠나가는 장충단 공원”
아빠가 없는 가을엔 정말 낙엽만 쌓여 있다. 돌이키면 나는 정말 세상에서 만나기 힘든 아빠를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이에겐 이런 아빠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아빠는 완벽했다. 돈이 많지 않아도, 엄청나게 세련되지 않았어도, 뜨끈한 추어탕 한 그릇 함께 먹으며 누군가의 마음을 녹여줄 수 있었던 그 사람은, 내겐 정말 과분한 사람이었다.
이 가을, 외로움을 달래며 아빠를 생각한다. 아빠도 지금, 나를 많이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