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sa Mar 20. 2024

대기업 그만두고 아르바이트하기

서른넷 대기업에서 퇴직한 후,  처음으로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어린이집 방과 후 영어 강사였습니다. 


 그 흔한 과외알바 한번 해본 적 없던 제가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아이들이 학교에 간 동안 2~3시간 남짓만 일하면 된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잘 키워보자고 퇴사했는데, 돈이 아이들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려면 회사를 그만두면 안 되었죠!) 이렇게 본격적으로 알바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방과 후 영어 교사의 페이는 시간당으로만 봐서는 괜찮은 편입니다. 시간당으로 계산하면 3만 원에서 4만 원 정도니까요. 하지만 하루에 일하는 시간이 길지 않아 제 손에 쥐어지는 돈은 80만 원 남짓이었습니다. 초보 지방강사였던 저는 시간당 3만 원을 받고  일주일에 7시간 정도를 일했습니다. 워라밸면에서는 완벽에 가깝죠.


회사에 다닐 때와 알바를 뛸 때의 차이점은 극명했습니다.


대기업에서는  팀을 옮기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면 그 사람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주는 편입니다. 당장 제 몫을 해내지 못한다고 해도 급여일이 되면 따박 따박 월급이 들어옵니다. 심지어 슬럼프에 빠져서 평소만큼의 아웃풋을 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욕은 먹고 고과는 깔지라도 월급은 입금됩니다. 


하지만, 알바 즉 프리랜서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가르치는 일로 돈을 벌어본 적 없는 저이지만 투입 즉시 저는 프로여야 합니다. 빈틈을 보였다가는 바로 교체입니다. 제 수업의 장점은 100% 영어로 수업이 가능하다는 점이었지만, 어린이집에서 보육을 해본 경험은 없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따라 주재원 경험이 많은 아이들이 있는 직장 어린이집 아이들과 케미가 잘 맞았지만, 인원이 많은 보육형 어린이집에서는 제 능력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살 아가부터 칠세 반까지 가르쳤지만 어린이집마다 저에 대한 평가는 제 각각 이었습니다. 영어로 수업해 주고 책을 많이 읽어주는 수업 특성상 학부모들이 너무 좋아한다는 곳도 있었지만, 아이들을 다루는데 서툴러서 아이들을 잘 통제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특히, 유난히 아이들이 통제가 안 되는 날들이 있습니다. 보통 비 오는 날이 그러더군요. 그걸 우연히 지나가던 부모님이 봤다가는 그날 바로 피드백이 들어옵니다. 유난히 힘들었던 유치원이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아이들이 갑자기 통제 불능이 되고 온 교실을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아이를 보러 왔던 부모님이 엉망진창 제 수업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곳은 결국 계약 해지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때는 진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아직 한글은커녕 한국말도 못 하는 아가들을 앉혀놓고 영어를 가르쳐준 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아가들과 워크북도 했습니다. 원장님께 워크북이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했지만 부모님들이 좋아하니 해달라는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완벽한  경험이었죠. 회사에서는 항상 갑이었는데 말입니다. 뭐 가르치는 입장에서 워크북시간이 제일 기다려졌습니다. 그 시간은 수업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한 살짜리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오히려  쉽습니다. 백설공주 앞치마에 리본을 달고 공주 선생님이라면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원맨쇼가 펼쳐집니다. 아이들이 한눈팔 시간도 주지 않고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영어 노래 메들리를 시작합니다. 현란한 율동과 노래만 있으면 아이들을 유혹(?)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제일 어려운 건 칠 세 반입니다. 미운 일곱 살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결국 계약 해지 통보가 날아온 것도 칠세 반이었습니다.) 


대기업 공채에서 면접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저였지만,  아이들 마음을 사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단군이래 돈 벌기 가장 쉽다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남들은 코인이다 주식이다 쉽게 벌지만..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저에게 돈 버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것도 기술이라면 기술이겠지만. 저 같은 문과생이 직함 때고 맨몸으로 뛰쳐나왔을 때의 세상은 만만치 않더군요. 


코로나가 심해지며 만 2년 만에 영어 강사 알바를 마무리되었습니다. 남편은 세상에 시급 3만 원짜리 알바가 세상에 어딨냐 했지만, 저는 미련 없이 아르바이트를 그만뒀습니다. 영어 수업과 보육 어딘가 중간쯤의 낯선 이방인으로 돈을 버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제 역량에는 참으로 벅찬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공황장애가 심할 무렵이었는데 마스크를 쓰고 노래를 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회사의 울타리를 벗어나 차가운 현실을 맛본 거죠. 


이렇게 제 영어 강사 알바는 끝이 났습니다. 

대학졸업 후 바로 신입사원 공채로 들어가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배우고 성장하고 매달 월급을 받던 저에게 아르바이트 경험은..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였습니다. 온전히 내 이름으로 서려면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나는 이렇게 조직 안에서만 온전히 나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어디 다닙니다 혹은 어디 다녔어요. 가 아닌 나로 온전히 돈을 벌기에 나는 아직 한참 부족하구나. 그래서 저는 나를 더 성장시키기로 결심합니다. 어떻게 성장을 시작했냐고요? 바로 대학원과 글쓰기였습니다. (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이전 03화 주말부부. 두 아이를 각각 한 명씩 키우고 있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