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아가며 한 번은 마주하게 될 이 현실은 슬프다. 너무 당연한 삶의 이치이지만 그래도 힘겹고 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누구의 선택이 아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삶의 기회, 생과 사. 그래서 우리는 ‘응애응애’ 울며 있는 힘껏 생의 문을 박차고 나와 남은 힘을 겨우 모아 힘겹게 숨을 내쉬며 생의 문을 닫고, ‘사후(死後)’라는 또 다른 세상의 문을 연다.
푹푹 찌는 공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았지만, 입추를 넘겼기에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이면 소슬바람이 간간이 불어댔다. 토요일 아침, 친하게 지내는 동생 지혜로부터 온 부고 메시지.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대충 메시지를 봤다. ‘어 부의네’하고. 조부 정도의 부의라고 생각했는데, 눈 씻고 다시 보니 상주 명단에 그녀의 이름이 있었다. 토요일이 주는 생기는 먹먹함으로 번졌고, 휴대폰을 잡고 있던 손은 떨렸다. 저마다의 사연이 넘쳐흐르지만, 초록이 동색 같은 장례식장에서 흘러나오는 눈물 반, 웃음 반은 비슷하게 닮았다. 깨끗하게 정리된 제단, 영정사진을 밝혀주는 촛불, 그 위로 타오르는 향 내음만이 이 공간에 흐르는 리듬이다. 만나면 웃고 떠들기 바빴던 우리는 웃을 수도 그렇다고 목놓아 울 수 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남은 이들의 손을, 마음을 매만져 주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 안타깝지만, 그래도 안다. 그것이 가장 큰 위안이란 걸 말이다. 그리고 눈물 가득 머금은 지혜의 눈동자 속에서 십 년 전 내가 보였다.
괜찮은 줄 알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하고 주문을 걸며 ‘괜찮은 척’ 살아온 것일지도, 혹은 그 일을 인정하기 싫어 피했을지도 모른다. 십 년이라는 시간을 돌이켜 보니 나는 괜찮았던 게 아니라 그저 괜찮은 척 마음을 숨기고 살아온 듯하다. ‘괜찮아’라고 여기며 버텨 온 지난 시간과 굳게 닫아둔 그 마음을 풀어보려 한다. 그 시간과 마음의 문을 스스로 열다 보면 작은 위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정말 괜찮아질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또 한편으로는 이미 떠난 사람이지만, 조금은 더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의 양가 식구가 많은 탓에 어릴 적부터 또래보다 많은 장례식을 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티브이에서만 보던 꽃상여가 할머니를 품고 산길을 올랐다. 대학생이 되니 해마다 장례식장에 갈 일이 생겼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학교에서 급히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할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외할아버지는 일찍이 옹기 장사를 했고 읍내 시장 초입에 집이 있었다. 샛길로 들어서는 데 동네 노인들이 집 앞에 나와 너도, 나도 한탄 중이다. 골목을 매우던 한탄 소리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옹기 앞에 선 동네 분이 곧 내게 닥칠 상황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게 했다. 입관식이 있던 날, 딸자식 중 할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엄마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나는 내내 울부짖던 엄마가 쓰러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40대 중반이던 엄마는 80이 넘은 제 아비를 잃었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 아빠를 떠나보내면서 엄마는 헤아릴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깊은 슬픔에 갇혀 있었다. 엄마는 할아버지와 작별을 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처럼 이랬을까?
이후로도 가족상(喪)은 계속되었다.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아빠가 돌아가신 해는 줄초상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우환이 넘실거렸다. 친가에 닥친 네 번의 장례를 모두 같은 지도사분이 진행했는데 당시 그 지도사는 “제가 이 댁과 이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29살, 적지도 그렇다고 많지도 않은 나이. 부친상을 겪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빠는 내가 태어나는 축복 같은 장면을 마주하고 기쁨을 누렸을 텐데, 내가 마주해야 하는 건 왜 이딴 거야? 왜 나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거야. 아빠 없이 남은 우리는 어떡해? 어떻게 살아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