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새 없이 돌아가는 컴퓨터 하드의 소리, 따-닥 따닥 멈출 줄 모르는 키보드 소리, 띡-띠 디딕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를 잠재우는 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다. 출근해서 퇴근 혹은 철야까지 이어지는 사무실 내 적막함을 깨는 건 라디오였다. 사무실 라디오 주파수는 항상 93.9 MHz이었다. 프로그램 진행자를 제외하곤 그 흔한 게스트도 없고, 사연과 신청곡 위주로 구성되는 데다 클래식, 영화음악, 가요, 올드팝 등 다양한 음악 장르가 시간대별로 흐르다 보니 건조한 사무실을 촉촉이 적혀주는 단비 같은 존재다.
이 노래도 그랬다. 처음 듣는 노래는 아니었지만, 그날따라 가사 한 구절구절이 마음이 와 닿았다. 어른의 출근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사무실 창문 너머에서 꼬마들의 등교가 시작되고 있다. 작은 공원을 사이에 두고 사무실과 구립 어린이집이 있다. 몇 마리 되지 않은 새들이 도심 한복판 인쇄소와 출판 사무실이 가득한 충무로 어느 골목에서 짹-짹 울어댄다. 일상의 소리를 뒤로하고 흘러나온 한 곡의 노래. 10월이면 유독 많이 소개되던 이 노래는 10월 1일에도 2일에도, 그리고 마지막 날인 30일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흘렀지만, 10월 16일 이후 내 마음에는 그 노래가 더 이상 같은 마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 라는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성악가 김동규와 조수미가 함께 부른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곡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동안 노래에 흠뻑 빠졌다. 소소하지만 그림 같은 일상의 가사가 10월의 시작을 따뜻하게 했고, 성악가의 깊은 울림이 가사의 여운을 더 진하게 했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은행잎 끝을 잡고 빙-그르르 돌리고 싶게 했다. 인터넷에서 바로 가사를 검색해 프린트했다.
퇴근 후 병원에 가니 수녀 이모가 왔다. 병원에서 내내 지루했을 아빠에게 가사를 읽어주려 주섬주섬 출력한 종이를 꺼내 “아빠 오늘 엄청 따스한 노래를 들었는데 가사가 좋아. 내가 읽어줄게”하고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갔다. 중간중간 울컥하고 감정이 복받쳐 올랐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마지막 가사까지 읊었다. 반쯤 세운 병상에 기대어 듣던 아빠도 흐뭇해하는 눈치다. 옆에 있던 수녀 이모가 이 노래의 정보를 덧붙였다. 원래 외국곡인데 노르웨이 뉴에이지 그룹인 ‘시크릿가든’의 <Serenade to Spring>이라는 연주에 한국의 한 작사가가 가사를 붙인 것이라고. 입원실에 흐르는 고만 고만한 기운에 몇 구절 노래 가사로 리듬을 불어넣었다. 그 순간만은 여유롭기 그지없는 휴일의 집안 풍경 같았고 해 질 녘이었지만, 따스한 볕이 창가에 비치는 눈부신 시간인 듯했다.
기분 좋은 10월의 노래를 출근길마다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딱 보름이다. 그렇게 10월의 어느 멋진 날 떠난 아빠를 보내고, 문득 아빠의 노래가 떠올랐다.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을 따라 부를 정도로 감성이 진했고, 김건모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따라 부를 때면 노래 속도를 따라가다 반 박자쯤 늦어지긴 했지만 흥이 넘쳤다. 김국환의 <타타타>를 구수하게 부르면서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고, 누군가의 노래에 우리네 인생이 담겼다 했다.
아빠도 분명 음악을 좋아했다. 나와 동생이 피아노 학원에서 배워온 곡을 집에서 연습할 때면 흐뭇하게 바라봤고, 완벽하지 않은 연주였지만 귀 기울여 들었다. 어린 시절 집에 있던 수많은 LP는 아빠의 취미를 말했고, 당시만 해도 내 키와 견줄만한 높이의 큰 스피커가 달린 전축이 안방에 ‘떡’하고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싫어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나의 10대에 HOT가 있었던 것처럼 아빠의 10대에도 인기 가수가 있었을 테고, 20대에 어떤 팝송을 들었는지 30대에 어떤 노래를 따라 불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알고 싶었다.
아빠와 따스한 노래 가사 한 줄 한 줄을 나누며 호흡할 수 있어서 좋았던 10월. 결국 10월의 어느 멋진 날 우리의 시간은 멈췄다. 알몸으로 태어나 옷 한 벌 건진 아빠는 하늘 위를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었고, 총 맞은 것처럼 정말 가슴이 너무 아픈데 살 수가 있다는 게 이상한 우리는 또 한 치 앞도 모르는 삶을 살아간다. 진작, 한 번쯤, 아니 한 번은 물어보면 좋았을 걸, “아빠는 어떤 가수, 무슨 노래를 좋아했어?”하고 말이다. 10월이면 기다렸다는 듯 흘러나오는 이 노래는 그날의 기억을 더 선명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