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밤 보랏빛 하늘과 와인
Marrakech, Morocco
세 번째 날 ▷ Tombeaux Saadien , Koutoubia Mosque
마라케시에서 두 번째 아침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확실히 맘이 여유롭다. 갓 구워내 따뜻한 모코로 식 팬케익이 참 맛있다. 예쁜 모로코 식기들에 담긴 아침 식사를 여유롭게 하고 리아드에서 예쁜 사진들도 담아 봤다.
경계 해제
오늘은 사디안의 묘와 바히아 궁전, 엘 바디 궁전을 가 볼 예정이다. 모두 숙소에서 도보로 가능하니 택시와의 사투는 접어둬도 되겠다. 숙소를 나서 제마 엘 프나 광장을 지나고 도로를 건너 다시 골목으로 걸었다. 하루 만에 이렇게 다 적응을 했나 싶다. 한번 건너려면 한참을 망설였던 규칙 없는 도로 건너기도, 언제 막다른 길을 마주 칠지 모르는 골목길들도 망설임 없이 걸어간다. 길을 헤매는 것도 재미있다. 거짓말쟁이들처럼 보였던 모로칸들도 정겹게 보인다. 내 맘의 경계가 풀리니 모든 것들이 한결 쉽다.
Tombeaux Saadien
몇 번 길을 헤매고 물어가며 도착한 사디안의 묘. 입구가 좁아서 살짝 찾기가 어려웠다. 좁은 입구를 돌아 들어가면 묘지라고 하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소가 나온다.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화려한 대리석과 금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왜 무덤이 관광명소가 되었을까? 16~17세기 100여 년 동안 모로코를 통치했던 사디 왕조가 알라위 왕조에 의해 무너 졌다. 이후, 왕권을 잡은 알라위 왕조의 술탄 물레이 이스마엘이 사디 왕조의 업적들을 모두 파괴하길 원한다. 종교적인 이유로 유일하게 파괴하지 않은 것이 바로 그들의 무덤이었다. 파괴 대신 묘 입구에 높은 벽을 세워 봉쇄했고 이곳은 20세기 초 발견되기 전까지 약 200여 년간 베일에 싸여 있게 되었다. 사디 왕조의 왕가 무덤으로 약 66여 명의 시신이 묻혀 있다. 야외 정원에 있는 무덤들은 상대적으로 직위가 낮은 고위 군인이나 왕가의 하인들의 무덤들이다. 직위가 높은 분들의 무덤은 실내에 안치되어 있다. 아래 사진이 바로 이곳의 가장 중요한 장소로 12개의 기둥 홀이다. 사디 왕조의 주요 왕과 왕자들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순백의 대리석으로 확실히 다른 곳들보다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이곳은 작은 통로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이곳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로 꽤 오랜 시간 줄을 서 기다린 후 볼 수 있었다.
바히아 궁전
바히아 궁전은 아름다운 궁전이라는 뜻의 아랍어다. 19세기 모로코의 최고의 궁전이었다고 한다. 흑인 노예 출신 시무사가 권력을 잡고 술탄의 지위에 오르면서 지어졌다. 그는 궁을 크게 확장 공사를 하고, 4명의 아내와 24명의 첩을 거느리며 호화롭게 살았다. 바히아라는 이름은 그중 가장 좋아했던 아내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얼마나 화려하게 잘 지어졌나 내부가 궁금했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다. 우리가 간 날에 궁에 행사가 있어서 관광객에게 오픈이 되지 않았다. 밖에서 봤을 땐 건물이 평범한 편이었는데, 이것 또한 아랍식 건축의 특징이라고 한다. 겉에는 창문 하나 만들지 않은 폐쇄형 구조. 대신 내부를 아주 화려하게 만든다. 그래서 공기 순환을 위해 건물 가운데 중정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마라케시에서 본 건물들은 대부분 적벽돌 색 허름한 건물들이었는데 내부는 화려하고 멋진 타일 장식과 중정으로 꾸며진 곳이 많았다.
엘 바디 궁전
엘 바디 궁전은 알라에게 바쳐진 아흔아홉 개의 명칭 중 하나라고 한다. 당시에는 호화로움의 극치로 여러 나라에서 공수해온 귀한 것들로 장식해서 만들었다. 하지만 왕조가 바뀔 때 값비싼 것들이 전부 이전되면서 지금은 뭔가 뼈대만 남아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 규모와 형태에서도 그 당시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아랍의 영향을 많이 받은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같은 무어 양식을 기본으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도 문을 닫았다. 저녁에 콘서트가 궁전 안에서 있어서 준비 중이라고 한다. 궁전 안에서 콘서트라.. 너무 멋지겠다. 우린 표도 구하지 못했고 내일 새벽 일정이라 아쉽지만 돌아서야만 했다.
모든 것들이 여행이 된다
궁전 근처를 방황하며 아쉬운 마음에 사진을 열심히 남겼다. 성벽이 참 높기도 하여라. 마라케시의 역사 관람은 제대로 못 하게 되었지만, 이 도시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걸어 다니는 것, 보는 것, 먹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자체로 여행이다. 계획이 틀어지는 것 또한 여행이다. 궁전을 둘러보며 관광객들과 함께 있었을 역사 배움의 시간을 대신해 우리는 로컬들과 함께하는 현실 경험의 시간으로 채워 보았다. 거리의 사람들 모습을 구경하며 이젠 모로코 사람들과도 곧잘 말을 섞었다. 쫄탱이 모드 해제. 슬슬 배가 고파져 식당을 찾으러 갔다. 상가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 보여 발길을 그쪽으로 향해 보았다.
사람들의 에너지로 넘쳐나는 이곳
숙소를 오갈 때 늘 지나가게 되는 메디아의 중심. 제나 엘 프나 광장은 밤이 되면 그 모습이 더 화려해진다. 첫날밤에 도착해 택시에서 버려졌을 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여기는 정말 가지각색의 모습들이 다 모여 있다. 파는 사람, 먹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헤나 하는 사람, 원숭이 데려다 쇼하는 사람 그리고 관광객과 로컬이 모두 뒤섞여 늘 분주하다. 별별 일들이 일어나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스쳐간다. 그리고 그 혼돈 안에서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만의 질서가 있는 삶의 터전이기도 한 곳이다. 이날 밤 어지럽다 느낀 이 광장에서 사람 냄새가 나는 정겨움이 느껴졌다.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마라케시는 붉게 물든 도시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다. 처음엔 건물들이 붉은 벽돌색이어서 그런가 생각했는데, 아마 하늘이 붉게 물들어서 가진 별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멋진 노을을 총 4박 5일을 있었던 마라케시에서 매일 볼 수 있었다. 모스크 뒤쪽으로 펼쳐진 멋진 노을에 저절로 발길이 이끌였다. 보랏빛 하늘과 초승달. 하늘이 이렇게 예뻐도 되나 싶게 예쁘다. 무슨 말이 더 필요 한가. 하루를 꽉 채워 보낸 후의 저녁시간, 지칠 법도 한데 레드불이라도 마신 듯 우린 이 예쁜 하늘 기운에 에너지가 솟았다. 마라케시의 밤을 맘껏 즐겼다. 이 도시 너무 매력적이다. 한 도시에 이렇게 여러 가지 면을 가지고 있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와 전혀 다른 오늘 그리고 또 다를 것만 같은 내일. 이 도시는 나에게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단짠단짠 한 그런 마력이 있다.
잠시만 안녕
숙소로 돌아와서 스페인에서 쟁여온 와인 한 병을 들고 옥상 테라스에 올라갔다. 내일 우리는 새벽 일찍 마라케시를 떠날 예정이다. 이 여행을 결정하게 만들었던 주범, 바로 사하라 사막을 간다. 12시간 장정의 버스 일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마라케시에서 무사히 잘 보낸 우리의 이틀을 자축하며 내일부터 일어날 새로운 경험들에 안전과 무사를 기원하는 의미의 건배. 이 도시에서 아직 못다 한 아쉬움이 있지만 사하라 일정 이후 다시 돌아와 3일을 더 보낼 예정이다. 잠시만 안녕. 2박 3일간 잘 보냈던 숙소도 안녕. 그럼 내일 새벽에 먼 길을 떠나야 하니 오늘은 이만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