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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약이다

이탈리아 응급실

by 로마언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이가 감당하기에 여행이 무리였던걸까,

식사 때 줬던 음식이 혹시 상해서 탈이 난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 체했나?


길지도 않은 여행이었다.

평소같으면 못해도 대략 일주일 가량일텐데, 남편의 스케줄이 맞질 않아서 고작 3박4일, 우리 여행패턴으로는 아직 짧은 여행이었다.

아이의 첫 번째 생일맞이였고 누가봐도 꽤 재미나게 여행을 즐기는 듯했는데, 여행지에서 돌아오자말자 고열에 시달리니 어린 아이에게 너무 무리였나싶은 게 마음이 너무나 편하지 않았다.


예방접종 후에도 항상 하루 꼬박은 열을 내던 아이였다. 해열제 한 번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해지곤 했는데, 이번엔 달랐다. 아무리 해열제를 먹여봐도 40도 고열은 쉬이 가라앉질 않고 3일 째 고군분투였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 내리 잠 만 자는 아이가 너무나 안쓰럽고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게 해열제 먹이는 것과 물수건으로 닦아주는 것밖이라게 속상했다. 병원을 갈까하다가 열 내린다고 작은 아이에게 더 힘든 시간이 되진않을까 솔직히 무섭기도 하고 웬만해선 병원은 가지말자 주의라 할 수있는데 까지 해보려던 참이었다. 근데 저녁 우유를 먹고 얼마지나지 않아 다 게워내고 말았다. 고집피울 때가 아니다. 가자 응급실.

이탈리아에서 10여년을 살아오면서 우리 부부에게 이탈리아 병원이란 아이를 낳을 때 빼고는 경험이 전무했다. 그동안 별 탈없이 건강하게 살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면서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는 알 수없지만 이탈리아 의료시스템에 대한 약간의 불신? 편견?이 있었다. 출산 때도 낯설고 울화통 터지는 이탈리아 병원 시스템에 심신이 지친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꾸 망설여졌다.


헌데, 더이상 고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아이의 고열이 3일 째 무려 40도인데 이젠 게워내기까지 한다.

아이들의 고열은 그 무엇보다도 위험하다는데 벌써 우리 고집 때문에 3일씩이나 시간을 헛보내진 않았을지 걱정도 앞섰다. 집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아이를 출산하기도 했었던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조건 응급실이다.

물론 전체가 무료는 아니다. 때에 따라서 병의 깊이가 중하지 않다고 여겨지면 비용을 받기도 하고 하염없이 대기를 해야하기도 한다. 헌데 대부분은 무료이다. 출산도 마찬가지이다.

평소에는 보건소 또는 개인 산부인과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고 진통이 오면 구급차를 부르든 직접 아이를 낳길 원하는 병원 응급실로 가면 된다. (물론 출산비용 또한 전체 무료이다)


이 대학병원엔 일반 응급실과 아이 전용 응급실이 따로 마련되었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아이 전용 응급실로 이동하여 접수를 했다.

간단하게 심박수 체크를 하고 잠시 대기한 후 당직 의사를 만났다.


- 아이의 열이 3일 째 40도 고열이예요, 오늘 오후 4시경 마지막 해열제를 먹였고요, 그 이후에 우유를 먹었는데 다 게워냈어요, 콧물도 좀 흐르고 간간이 기침도 하는데 목이 좀 쉰 것도 같아요


당직의사 아래 레지던트로 보이는 남자의사가 아이의 입 안, 귀 속을 확인하고 청진기를 대어본다. 곧이어 당직 의사 또한 청진기를 대곤 말한다.


- 소리는 멀쩡하고 아무 문제 없어요,

3일 고열은 너무 일찍 병원에 온 거예요, 혹시 내일도 열이 지속된다면 동네 소아과를 방문해보세요


- 해열제를 먹여도 전혀 온도가 떨어지지 않아요

그럼 해열제를 바꿔보면 어떨까요?


- 해열제 효과가 곧장 드러나지 않을 수가 있으니 먹이던 걸로 계속 먹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굳이 바꿀 필요도 없어요


안고있는 아이는 여전히 불덩이로 뜨거운데 아무 문제가 없단다. 고열 3일은 너무 일찍왔다는데 그럼 대체 얼마나 우리 아이가 더 아파야지만 병원에 와야하나, 이래서 우리는 이탈리아 병원을 불신하는 건가, 우리가 외국인이라서 그런걸까, 별별 하찮은 생각들이 다 들기 시작한다.


결국 해답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그 밤도 여전히 40도 고열로 지새웠다.


다음날 결국 동네 소아과를 갔다.

8월은 이탈리아 전체가 대부분 휴가이다.

다행히 병원은 전체 휴가는 아니지만 오전 근무만 했다. 오후에 들른 우리는 결국 소아과 의사 또한 만나지 못했다.


속은 더 없이 타들어가고 마지막으로 약국으로 가서 아이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기존에 먹이던 것과 다른 해열제를 구입했다.

밤 사이 아이의 열은 여전했고 새벽 4시 해열제를 다시 먹이곤 남편과 번갈아 아이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다가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화들짝 놀라 일어나보니 동이 트지도 않았는데 남편은 그새 일을 나간모양이다.

등 돌려 누운 아이의 등에 손을 살짝 대어보니 열 감이 없다. 온도계로 곧장 확인을 했다. 36.5도 초록색 정상이다. 5일만에 아이의 열은 내렸다.


낮 동안도 예의주시하며 지켜보았지만 5일만에 열은 완전히 내렸다. 바꾼 해열제 덕분인지 기존 해열제의 잠복기가 이제 나타나는 건지 어쨋든 열은 모두 내렸다. 돌치레 혹인 돌발진이라더니 열이 내리니 열꽃이 조금씩 오르긴 하지만 이것 또한 시간이 지나면 나을텐데 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그러니 문득 3일의 고열은 너무 빨리 왔다던 응급실 의사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당시엔 주사 한 번, 수액 한 번 주지 않는 이탈리아 병원이 너무나 야속했는데 과잉진료없이 자연 치유진료인 이탈리아 병원이 옳았던 걸까


그 의사는 시간이 약이란걸 알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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