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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Dec 16. 2020

14. 어느 예술가 (20.12.16)


 12월 11일에 김기덕 감독이 코로나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이 한 예술가의 죽음을 통해서 생각할 것들이 생겨났다. 

학력이 전무한, 그것도 뒤늦게 30대에 예술을 해서 천재, 거장의 칭호까지 듣던 사람에서 성추행, 성폭행 등과 관련된 사건으로 나락까지 떨어진, 한 사람의 예술인생이 막을 내렸다. 그의 이력을 보면 정말 천재가 아니고서는 이뤄낼 수 없는 업적들이긴 하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더 아이러니하다.


 나는 예술가와 예술 작품이 이어져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기덕 역시 그런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그런 작품은 절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술의 다양성 측면에서 그와 같은 예술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을 듯하다. 그 이유는 그의 예술 안에서는 불쾌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의 예술을 하나 접한 뒤 현실적 불쾌감에 사로 잡혀서 그의 예술을 크게 선호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런 작용 역시 한 예술의 측면이다.


 사실 우리는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예술가에게서, 더 넓게는 위대하다는 인물들에게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폴 고갱, 피카소, 로만 폴란스키, 홍상수, 에디슨, 아인슈타인,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등등 너무나 많다. 정말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도덕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일전에 로만 폴란스키의 ‘더 피아니스트’라는 영화를 보고 너무 큰 전율이 온 적이 있다.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이다. 그런데 로만 폴란스키의 사건이 터지고 난 후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가 이 사건을 인지함에도 그전의 강렬한 감정은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 억지로 아니라고 부정해봐야 말 그대로 억지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로만 폴란스키의 도덕적 결함이 싫다. 어쩌면 그가 싫다. 그런데 그의 영화는 좋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 영화는 너무나 좋은 감정으로 남아있다…


 유일할 줄 알았던 첫 경험을 접한 뒤 이 것을 아주 예외의 상황으로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와 못지않은 예술가, 과학자, 정치가 등등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내가 이미 엄청나게 좋아한 사람들 중에...


 이러한 지속된 경험을 통해서, 작품을 예술가와 분리해서 봐야 하는 건지 혼란스럽다. 아니 애초에 그게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다. 작품은 곧 예술가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데, 둘을 나눠서 좋아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그 이유를 얘기해보자면,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관념이 들어가 있는 것이고, 그 관념은 그 예술가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따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잡히지 않는 관념을 어떻게 따로 분리할 수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관념은 분리해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 섞이고 섞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떠한 형태의 예술이든 예술가 고유의 관념이 녹아들어 있다. 가령 작품에 대해서만 말하고 예술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 봤자 이미 작품만으로 충분히 예술가를 소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외의 경우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좋아한 작품들을 작가와 분리한다는 것은 그저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바람 그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그 정도 기준은 완벽하진 않지만 나름 객관적인 면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맹목적인 것보단 훨씬 나은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분리해서 생각하기를 나 자신에게 바란다. 


 반면에 그런 기준으로 예술을 분리해 검열한다면 비도덕적이고 추하고 더러운 쪽의 관념들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현대 미술계 역시 그러한 수많은 예술가와 관념으로 이어져왔고, 지금 현대만을 보더라도 데미안 허스트와 같이 허용하기 쉽지 않은 관념들이 발전되어왔다. 이것을 다양성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역사 안에서는 다양성에 손을 들어준 것을 알 수 있다. 김기덕의 작품들도 그렇게 남아있게 될 것이고 세월이 지나 어떠한 재평가가 될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어떠한 방향으로든 그는 계속해서 언급될 것이라는 것이다.


 난 그를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혹은 예술을 그렇게 봐야 할지도 모른다. 예술 안에 도덕적 문제는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도덕적인 면은 예술 안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면이면서 아니기도 한 것 같다. ( 결국 정도의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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