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기 시리즈 13
습관적으로 막연한 불안감이 불뚝 튀어나왔습니다.
순간 수업이 취소된 것에 대해 아이들 앞에서 난리 난리를 쳤던 제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웠고, 어떻게 해야 이 어색한 분위기를 다시 수습하고, 자연스럽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지가 막막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어?”
“머리 복잡하게 미리 고민하지 않는다. 가서 생각한다.”
라는 마음을 먹게 되자, 이내 다시 평온을 되찾게 되었지요.
저는 가뜩이나 입시로 인해 머리가 복잡해진 아이들에게 굳이 더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주제로 수업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어차피 아이들 간에 수업 이해도 차이가 너무나 벌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교안을 보고 2시간 동안 읊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동안 모둠별로만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책상 배열을 모두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배열로 전부 바꿔버립니다.
저 또한 위에서 아래로 아이들을 내려다보던 교탁에서 내려와, 눈을 맞추고 대화하기 편안한 책상에 함께 둘러앉게 됩니다.
자리를 모두 조정한 후, 저는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4명의 아이들에게 그동안의 진행 상황을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던 친구들에게도 들려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현재 상황에서 본인들이 더 나아가지 못했던 여러 고민과 어려움들을 털어놓게 되는데요.
“너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을 거냐고.”
그랬더니, 이 질문을 받은 아이들이 차례대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요.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대답일지라도 저는 한 명 한 명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반면 이 프로젝트를 실제 진행하는 아이들에게는 발언권 없이 경청만 하게 두었는데요.
저는 이 아이들의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선 더 다양한 관점으로 시야가 확장될 수 있게 돕는 피드백 그룹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이 선택했던 주제 자체가 서로 다른 관점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더 나아가 반대 입장에 가진 사람들도 함께 참여를 독려해야 하는 굉장히 까다롭고 민감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특정 주제에 대한 자신들과 전혀 상반된 입장을 가진 이들의 의견을 주의 깊게 듣고 관찰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다만, 혹여나 서로 언쟁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일단은 의견이 같은 한쪽 그룹은 반대쪽 그룹의 이야기가 모두 끝날 때까지 경청만 하게 두었던 것이지요.
저는 이 과정에서 분명 현재 멈춰진 프로젝트를 해결하는 굉장히 중요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일단, 그동안 피로에 찌들어 멍하니 제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던 아이들이 특정 주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자리가 마련되자 눈에 활기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보면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 안에서, 미처 저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프로젝트의 실마리들이 마구 튀어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관찰하고 경청하게 뒀던 실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아이들 그룹에서는 처음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평소엔 관심도 없던 애들이 자신들의 프로젝트 주제에 대해 갑자기 말이 많아진 게 낯설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내 점점 자신들과 다른 관점을 가진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사고가 확장되었지요.
1교시엔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는 피드백 그룹의 토론, 2교시엔 이 상황을 지켜보고 경청하던 실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아이들의 실행 계획의 보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방식은 수업이 최종적으로 끝날 때까지 무한 반복 되었지요.
물론, 수업 진행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아이들이 더 이상 수업에서 이탈하지 않는다거나, 수업 환경이 엄청 드라마틱하게 변했거나, 하진 않았어요.
정말 이 아이들의 수업은 최종적으로 끝날 때까지도 매주 예측할 수 없는 다사다난 한 여정이었지요.
아이들이 다음 수업에 얼마나 빠졌을까, 과제는 제대로 해올까 하며, 전전 긍긍하지도 않았고, 더 이상 완벽한 교안을 만들겠다고 애쓰지도 않았지요.
이 오지도 않았고, 감히 예측할 수 도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걷어버리고,
그저,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잘 관찰하고, 그때그때 맞는 질문과, 토론 주제를 던져주었습니다.
또한 프로젝트 과정에서 시도해 봤는데 효과가 없었던 실행 전략은 과감히 버리고, 아이들과 담당 선생님과 함께 머리를 맞대며 현재 상황에 맞는 실행 전략을 다양하게 만들어 빠르게 적용하며 나아갔지요.
지금 시점에서 이때를 회상해 보면,
더 이상 막연한 삶에 대한 두려움이나 상황을 통제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1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 삶의 불확실성은 호기심. 더 나아가 설렘이 되었고,
“이번주에 짜본 전략이 제대로 먹힐까? 어떤 결과를 도출하게 될까?”
라며, 마치 인기 드라마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 마냥, 흥미진진했어요.
애초에 드라마 보다 결과를 더 예측할 수 없으니, 그럴 바엔 빨리 다음 편을 보고 싶을 정도로 매수업이 기대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항상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 한 주도 무탈하고 평온하시길 바랍니다.
김고래 드림.
지금 발행하고 있는 채우기 시리즈의 앞전 이야기인 "비우기 시리즈"를 최근부터 영상 에세이 형태로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혹시 긴긴밤 제 이야기가 생각나신다면, 언제든 편하게 들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