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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건 Oct 27. 2018

왜 그들은 밤에 무리 지어 뛰는가?

[업 에세이] 콘텐츠 플랫폼 마케팅

가을 공기가 제법 선선하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다. 바람 불면 상쾌하다. 봄에 기승을 부리던 미세먼지도 적다. 깨끗한 공기가 머리를 맑게 한다. 햇빛 아래선 살짝 덥고 그늘은 서늘하다. 조금 춥다 싶어도 겉옷 하나 걸치면 그만이다.


“이렇게 좋은 날은 짧아요." 주당들은 안다. 이렇게 밖에서 술 먹기 좋은 날이 많지 않다는 걸. 지금까지 너무 더웠고, 이제 곧 찬바람 불고 추워진다. 맑은 공기만큼 좋은 안주는 없다. 간간히 부는 바람은 올라오는 취기를 달래준다. 흥겹게 마시다가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을 연남동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술을 더 맛있게 먹을 곳을 찾아 헤맸다. 우리와 같은 목적의 사람들을 오며 가며 마주쳤다. 반가웠다. 동질감 느껴졌다.


공원길을 걷고 있는데, 우리의 목적과는 사뭇 다른 사람들을 마주쳤다. 20여 명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달리고 있었다. 리더 격의 사람이 앞장섰다. 가벼운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구보하는 군인들 같았다.


우리는 공원이 잘 보이는 테라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맥주 한 잔 들이켰다. 맛있고 시원했다. 밖에서 술 먹기 좋은 날은 짧다. 뛰기 좋은 날도 그만큼 짧다. 이렇게  좋은 날, 술만 먹고 있는 나를 보니 씁쓸했다. 술이 더 당겼다.


공원을 달리는 무리가 또 지나갔다. 술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해 공원을 걷는 이들과, 땀 흘리며 뛰는 이들이 한데 어우러졌다. 저녁 9시, 달이 밝은 가을밤이었다.


쉽게 모이고 쿨 하게 헤어지다


밤에 뛰는 무리를 만나고 난 후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왜 밤에 뛸까? 밤에 뛰는 것보다 무리 지어 뛰는 이유가 더 궁금했다. 대부분 20대로 보였다. 질문을 다시 했다. 왜 20대들은 밤에 무리 지어 뛰는가?


나만 궁금한 게 아니었나 보다. 10월 6일자 조선일보에서 궁금했던 기자가 직접 뛰어보고 기사를 썼다. <레깅스·톱 입은 수십 명 함께 구호..'러닝 크루' 세상 된 한강공원> 기사의 일부를 발췌했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공지가 뜬다. '10월 1일 월요일 19시 50분, 서울숲역 3번 출구.'

대기 중이던 크루(crew·팀원)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따라오라' 손짓한다. 서울숲 방향으로 걸었다. '러너(runner·뛰는 사람)' 수십 명이 레깅스와 쇼츠, 브라 톱 차림으로 가볍게 몸을 풀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러너들이 지정된 장소에 모이면 '체크인'이 시작된다. 일종의 '출석 체크'. 참여 횟수를 세고 출발 인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크루 깃발을 들고 단체 사진을 찍고 나서 준비운동 장소로 600여 m 일사불란하게 이동했다. 몸풀기 운동을 마치고 코치로부터 '오늘의 러닝 계획'을 듣는다. 5㎞를 뛰는 초보자 그룹부터 12㎞를 뛰는 숙련자 그룹까지, 각 그룹 페이서(pacer·속도 조절자)와 러너들이 모여 "파이팅!" 구호를 외치면 90여 분 레이스가 시작된다. (중략) 참가 공지는 인스타그램 같은 SNS로 이루어진다. 알려준 ID로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거나 링크에 적힌 구글 DOCS를 통해 신청서를 제출하고 게스트로 참가할 수 있다.'


기사 덕에 궁금증이 해소됐다. 이들은 ‘러닝 크루’였다. SNS 인스타그램으로 공지를 올리고 카카오톡이나 구글 DOCS로 참가 신청을 한다. 약속된 장소에 모여 출석 체크를 한다. 사진을 찍고 정해진 계획대로 뛴다.


온라인 기반의 오프라인 모임이다. 옛날식 표현으로 ‘번개’다. 번개는 사전에 공지를 올리고 참가 신청을 받는다. 참가자 리스트를 만들고 만나는 장소를 공유하는 과정을 거쳤다. 오프라인 모임 꾸리는 사람들의 공수가 많이 들었다.


참여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신분과 정체를 밝혀야 했다.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끈끈하게 그들의 커뮤니티를 만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물 관리’도 필요했다. 100문 100답 같은 불필요한 정보까지 묻곤 했다. (간혹 100문 100답에 ‘첫 키스는 언제?’ 같은 무례한 질문도 있었다.) 그런 끈끈함은 커뮤니티 운영의 원동력이 됐다.


‘러닝 크루 모임’은 SNS 시대 ‘번개의 진화 모델’이다. 카페와 같은 전통적 인터넷 커뮤니티보다 더 가볍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SNS가 커뮤니티의 베이스캠프가 됐다. 모바일 디바이스로 언제든 모임을 만들 수 있다. 팔로우 간 네트워크로 모임 소식은 순식간에 널리 퍼져나갈 수 있다.


언제든지 본인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익명으로 소통 가능한 메신저가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됐다. 카카오톡의 오픈 채팅은 본인을 밝히지 않아도 소통 가능하다. 친구가 아니라도 링크만 공유된다면 대화할 수 있다. 익명 참여가 가능하고, 이 상태에서는 프로필이나 개인정보가 상대방에게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익명이 보장된다. 프로필 사진은 카카오 프렌즈 캐릭터 중에서 랜덤으로 선택되고, 다른 캐릭터로 바꿀 수 있다.


플랫폼의 즉시성과 익명성이 강해졌다. 온라인 기반의 오프라인 모임은 더 가벼워졌다. 쉽게 모이고 쿨 하게 헤어진다. 이제 끈끈함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느슨한 커뮤니티’가 사람들을 더 끌어당긴다.


TMI, too much information의 약자로 다른 사람이 궁금해하지 않는 내용도 자신이 먼저 나서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렇게 본인의 TMI를 밝힌 사람들은 상대에게도 TMI를 원한다.


SNS 시대, 사람들은 TMI에 지쳤다. 미국에서는 TMI 증후군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TMI를 피해 SNS에서 친구를 차단하거나 탈퇴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SNS상의 TMI를 피하고자 익명성과 즉시성을 찾는다. 느슨한 커뮤니티에서는 친해지기 위한 호구 조사나, 100분 100답 같은 쓸데없는 커뮤니케이션이 없다. 명확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한 행동만 한다. 목적이 무사히 완수되면 깔끔하게 헤어진다.


유병재는 왜 고독한 팬 미팅을 했을까?


지난 8월 유병재 씨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팬미팅’을 열었다. 800명의 팬들을 건국대 큰 강당에 모아놓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적막하고 고독한 팬 미팅이었다. 이런 기괴한 팬 미팅의 티켓은 10초 만에 매진됐다.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2시간 동안 유병재 씨와 800명의 팬들은 열심히 소통했다. 말 한마디 없이 오로지 채팅으로 대화를 나눴다. 무대 앞 화면에 카카오톡 창 두 개가 띄워졌다. 하나는 유병재 씨가 올리는 글이 보이는 화면이다. 다른 하나는 800명이 동시다발적으로 올리는 오픈 채팅 단체방이다.



유병재 씨의 차진 드립에 누군가가 큰 소리로 웃기라도 하면 스님 복장을 한 스태프가 뒤에서 죽비를 내려쳤다. 묵언수행을 방불케 했지만, 채팅방은 쉴 새 없이 북적였다. 말은 없었지만 할 건 다 했다.  카카오톡으로 팬들과 게임을 했다. 소리 안 내고 밥도 먹었다. 음악 없이 한 달간 연습한 빅뱅의 ‘뱅뱅뱅’도 췄다. 군대 간 빅뱅을 내세워 그의 소속사인 YG를 ‘깨알 홍보’하는 모범 사원의 자세도 보였다.


유병재 씨가 이런 독특한 팬 미팅을 기획한 이유는 “제 팬 분 들이 저처럼 낯가리고 소심한 분들이 많아서”라고 했지만, 그간 B급 정서에 기반한 풍자 개그를 선보여 왔기에 담겨 있는 의미는 크다. SNS에서 ‘유병재 얼굴 그리기’ 등 팬들과 다양한 소통을 해왔다. 팬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본인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SNS상에 과시하고 싶어 하는 현재의 트렌드도 잘 파악했다.


SNS의 발달로 스타와 팬들 간 소통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 이제 스타는 별처럼 팬들이 바라만 보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팬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고독한 팬미팅’은 익명성 기반의 오픈 채팅이라는 소통의 트렌드를 잘 살렸다. 팬이 아니어도 보러 오고 싶게 만드는 독특한 콘셉트의 기획이다.


오픈 채팅 방에서 유병재 씨와 유병재 씨의 팬들은 동질감을 느끼고 원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했다. 여기선 누구도 모임에 나오라 강요하지 않았다. 당신이 누군지 꼬치꼬치 물어보지도 않았다. 묵언의 팬 미팅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달성했고, 2시간 만에 쿨 하게 헤어졌다. 느슨한 커뮤니티다.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콘텐츠 플랫폼을 운영하다 보면 이용자 분들께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제 콘텐츠를 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그때 난 이렇게 대답한다. “어떤 분들인지 대충은 파악할 수 있지만, 정확하진 않아요. 무형의 데이터를 보는 것보다, 직접 팬들과 대화해보거나 만나보시는 게 어때요?”


직접 소통하면 10번 데이터 들여다보고, 100번 상상한 것보다 훨씬 정확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무형의 데이터가 유형의 데이터가 된다.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 같은 상상 속의 무엇이 아닌 ‘사람’을 느낄 수 있다.


오픈 채팅을 열어서 직접 소통해보자. 러닝 크루처럼 리더 크루(reader crew)를 만들어보자. 오픈 채팅은 누구든 쉽게 들어오고 나올 수 있다. 읽고 답장을 하지 않아도 오픈 채팅에선 흉이 되지 않는다. 말하고 싶을 때만 말하면 된다.


1이 없어지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대화 나누다가 마음 맞는 사람끼리 따로 오픈 채팅방을 만들어 깊은 대화를 나눠도 된다. 채팅이 답답하면 직접 만나도 된다. 오픈 채팅 월드에선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한 번 만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니다. 가볍게 만나고 쿨 하게 헤어지자. ‘느슨한 커뮤니티’에 새로운 마케팅의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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