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고 시기까지는 내가 말 없는 편이라는 걸 몰랐다. 또래 친구들과 친해지는 게 어렵지 않았고, 아이돌을 쫓아다닐 때 처음 본 사람들과 금방 어울리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후 예의를 차려야 하는 교수와 선배가 생기자 말하는 게 어려웠다. 특히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비슷한 공감대가 없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말을 못 했다.
말하는 게 어려운 건 회사를 다니면서 심해졌다. 입사 동기 없이 팀의 막내로 입사하자 사수와 8살 차이가 났고, 미팅을 가거나 회식할 때 더 많은 나이 차이의 사람들을 만나면 힘들었다. 그들이 하는 대화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리액션을 해도 결국 돌아오는 말은 “목소리를 못 들어봤다”, “원래 말이 없는 편이냐”였다.
절대 말을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건 아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못한다. 처음 보는 사람이어도 또래면 낯가림 없이 할 수 있는 말이 많다. 그런데 가뜩이나 어려운 자리에서 “억지로 끌려 나왔냐”, “목소리 좀 들려드려라” 소리를 듣고 나면, 잘 말할 수 있던 것도 더 말하기 힘들어진다. 친한 친구들에게 회사에서 말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면 의아해하곤 한다. 솔직히 남한테 말 없다 하기 전에 대화 주제가 철저하게 자신들 중심이지 않았나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여러 번의 이직을 경험해 본 결과, 팀원들이 이미 오랫동안 같이 일하면서 친해져 있으면 그 사이에 끼어들고 어울리기 어렵다. 자꾸 대화 주제가 나는 모르고 자신들이 아는 이야기만 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래서 나보다 늦게 입사하는 사람들은 나처럼 소외되지 않고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퇴사 후에도 연락하면서 연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나보다 늦게 입사한 사람들이 많다.
I라서 그런 건 아니에요
이렇게 말이 없으면 다들 MBTI를 앞세우고 “I라서 그래”라고 한다. 아무리 공감대가 맞지 않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어려운 자리여도 말을 해야 한다는 건 안다. 때문에 ‘오늘은 이런 말을 해보자’ 준비까지 해가며 노력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나 좀 사회화된 I 같다’라고 생각하며 성장한 스스로가 대견할 때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미팅이어도 또래거나 공감대가 맞으면 대화가 끊기지 않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지만, 공감대가 맞지 않는 윗사람들을 만나면 급격하게 할 말이 없어진다. 기어이 “낯 가리고 조용한 편이냐”는 말까지 들으면 자신감이 확 꺾인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 사람들은 이 자리 이후로 계속 ‘쟤는 말 없는 애’라고 낙인을 찍어서 만날 때마다 말 없는 것에 대해 지적한다.
한 번은 I는 조용하다는 편견이 지겨워서 E라고 거짓말을 해보았더니 모두가 나를 사교성 좋고 활발한 사람이라고 인식하기도 했다. (MBTI 검사를 해보면, E와 I의 차이가 크지 않긴 하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말이 없는 건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말이 많고 가벼워서 실수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말 많은 사람에게 “너는 말이 왜 이렇게 많아?”라고 묻는 경우는 적은데, 말 적은 사람한테는 “너는 왜 이렇게 말이 없어?”라고 묻는 무례한 경우가 빈번하다. 말 없냐고 물을 시간에 그 사람이 어떤 관심사를 갖고 있는지 챙겨주고 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말이 많든 적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