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사회 입문기(3)

다시 한번, 지구별에 온 걸 환영해

by 우주

‘이거를 이렇게 자르면 어떡해! 안 먹어-!’ 안방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J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편의점에서 파는 피카츄가 그려진 치즈빵을 J가 반으로 뚝 잘라서 그릇에 담아 준 모양이다. 우주가 좋아하는 귀여운 피카츄도 사정없이 반으로 잘려 있겠지. ‘미안해- 아빠가 우주 먹기 편하라고 잘라준 거였어.’ 지극히 딸바보인 J가 혹여나 우주가 빈속으로 어린이집에 갈까 봐 한 입이라도 먹이려 살살 달랬다. ‘다음부턴 그러지 마.’ 한풀 화가 꺾인 30개월 아기 우주의 대답. 이어서 냠냠 맛있게 먹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누가 보면 어떤 집안에든 한 명씩은 꼭 있는 금쪽이 중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대번에 웃음이 터졌다. 짧은 우주 인생에 처음 나온 말이어서, 그게 너무 신기하고 기적 같아서 웃음만 나온다. 문장을 말한다는 건 생각을 구성하고 감정을 전달하고 상대의 반응을 예상한다는 뜻이다. 그전까지는 단어 몇 개와 몸짓으로만 소통하던 우주가 최근 들어 말이라는 걸 통해 나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싫어’ 같은 단어들은 익숙했지만 대부분은 상황 안에서 그 뜻을 짐작하는 수준이다 보니 늘 그 안에서 우주의 마음을 추측하며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그런 시절을 지나 우주는 이제 제 감정을 말하고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려준다. 설명하고 받아들이는 일련의 과정이 이제 우주의 언어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주가 슬슬 말을 하기 시작하니 내가 몰랐던 본인만의 세계가 대략적이나마 어떤 형상인지를 떠올리게 된다. 작년까지만 해도 단순히 어떤 목소리로 어떤 말을 할까 정도만이 기다려졌는데 지금은 그 언어를 통해 우주가 나와는 다른 스스로의 존재로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만큼 실감이 난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순간순간 마다 경이로움을 느낀다. J와 내가 하루 중 나누는 대화의 절반 이상은 우주 이야기이다. 둘이 저녁에 마주 앉아 오늘 우주가 어떤 일을 했는지, 그런 우주를 보고 어떤 것을 느꼈는지, 얼마나 이뻤는지를 조잘조잘 떠들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각자의 고단한 하루를 그렇게 씻어 내리며 내일 또 하루를 살아갈 행복감을 충전한다.


주변에 아기를 일찍 낳아 벌써 고등학생 자녀를 둔 지인이 있다. 자식 키우는 이야기를 하며 내가 요새 들어 우주가 이뻐죽겠다는 말을 하니 ‘사춘기 와봐라.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걸 낳았나 싶을 거야~’ 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렇겠지. 우주도 사춘기가 되면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것 같아 답답할 때도 있을 것이고 정말로 어쩔 수 없이 멀어지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주를 낳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오늘이 지금껏 내가 살아온 인생 안에서 가장 빛나는 날임에는 틀림없다. 처음에는 우주가 내 뱃속에 있다는 사실이 마냥 생소했고 태어난 이후에도 한동안은 내가 이 약하디 약한 존재를 책임질 수 있을지 불안하고 힘겨워 몸부림쳤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눈을 맞추고 조잘조잘 이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우주가 내게 와준 건 내 인생에서 일어난 일 중 가장 기쁜 일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앞으로도 우주는 자기 세계를 더 많이, 더 명료하게 내보이며 탄탄히 만들어 나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행동이나 말들이 항상 내가 원하던 방식은 아닐 것이고, 때로는 당황스럽게 하거나 속상하게 만들 때도 있겠지만 그 모든 일들을 우주만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려 한다. 나는 이미 우주와 함께 산을 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한 번에 넘지 않아도 되고 어떨 땐 옆에만 있어도 된다는 것을. 같은 방향을 보고 있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날들이 있다는 걸 안다. 쉬운 날은 많지 않겠지만 나는 우주 덕분에 그 산들을 기꺼이 넘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네가 있어서 넘게 되는 산. 그리고 너와 나의 다르지만 따뜻하고 긴밀하게 연결된 세계.


안녕 아가, 안녕 나의 우주야. 다시 한번, 지구별에 온 걸 환영해!

keyword
이전 14화5장 사회 입문기(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