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를 하면서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육아를 한다는 누군가를 만나보면 다 한구석에 잔뜩 엉켜버린 새까만 무언가가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것이 육아 우울증의 진짜 얼굴. 다만 우리의 일상이 늘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그런 해묵은 감정을 애써 누르고 모른 척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감정들이 넘치고 넘쳐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가 있는데 , 참 별 것 아닌 이유로도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어제저녁이었다. 설거지는 산처럼 쌓여있고 아기는 밥을 먹다 말고 자꾸 장난을 치고,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은데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황.
옆에 있는 도마를 꺼내다가 팔로 툭 쳐서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이 바닥을 뒹굴었다. 갑자기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다. 나는 마치 화를 낼 이유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폭발해버렸다.
“그냥 다 싫다.”
주방 너머로 남편의 걱정 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호르몬 탓인가 봐, 오늘따라 감정조절이 안되네.” 되지도 않는 말을 나지막이 중얼거리곤 달아오른 그릇을 맨손으로 집어 든다. 수건으로 바닥을 훔치며 물기는 어느새 다 사라졌는데 쏟아진 내 마음은 아직 바닥에 흥건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가만히 생각하면 나는 육아를 하는 동안, 내 마음을 돌보는 법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먼저 배웠다. 나의 우울에는 늘 분명한 원인이 있었지만 상황은 늘 똑같았고, 그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길어지자 그저 있는 힘껏 마음을 누르고 다스리는 법을 먼저 배운 것이다.
육아는 매 순간이 치열했다. 내 마음을 돌볼 체력도 여유도 없이 아이의 뒤만 쫓아다녔다. 아이의 나와 관계는 처음부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고, 나는 언제나 아이 앞에 먼저 서지 않고 조용히 곁을 지켰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자라났다.
아기를 낳으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 따위는 되지 않을 거라 다짐했었다. “아기의 인생이 소중한 만큼, 엄마의 삶도 마찬가지잖아.” 하며 열변을 토하던 나의 엉터리 육아 철학은 병원에서 마주한 아기 얼굴을 보는 순간 형체도 없이 흩어져버렸다. 핏덩이 아기와의 관계의 시작은 그런 것이었다.
벌써 3년 전인데 임신 전에 입던 옷을 아직도 입는다. 아기를 낳고 난 뒤 무언가 제대로 내 것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다. 기질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 나의 신경은 온통 아기에게 쏠려있었다. 어디서 유기농 파스타면을 팔지? 여기에 이걸 넣으면 잘 먹을까? 이 모자는 우리 애가 쓰면 예쁘겠다.
내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 햇빛이 내리쬐는 길 한가운데 심어져 있다는 사실은 누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햇빛, 내리지 않는 비. 나뭇가지를 타고 노는 아이의 모습이 좋아 오늘도 있는 힘껏 팔을 뻗어 광합성을 해본다.
이렇게 문득 화가 치미는 날이면 자꾸만 나를 돌아보게 된다. 모두가 육아를 하는데 아기들은 자꾸 태어나고 무럭무럭 자라는데 나만 이런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마음이 건강한 육아를 하고 싶었는데 나는 분명 괜찮은데 괜찮지가 않다.
육아 우울증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현실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아이와의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데, 꽤나 괜찮은 날들을 살다가도 이렇게 스위치가 켜진 날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다가온다. 2018년 울고 싶었던 어느 하루, 나는 마음껏 울었지만 이제 그럴 수도 없다. 내 울음이 너의 울음이 될까 봐, 나는 마음껏 울지 못하고 다시 마음을 내리누른다.
빨갛게 힘을 주고,
오늘의 이 마음을 내리누른다.
내일이 오면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저 묵묵히 평소와 다름없는 날을 보낼 것이다. 너로 인해 참 많이 웃고, 가끔은 의미 없는 말들을 떠들면서.
네 작은 손을 잡고 산책을 나서고, 너와 나란히 앉아 밥을 먹고, 네 입에서 나오는 동그랗고 따뜻한 목소리를 들으며 너를 품에 더 꼭 안고 그렇게.
그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