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은 육아 적성은 아닌 것 같아."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렇지? 나는 좀 안 맞아."
육아에 과연 적성이 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은 적성 찾기에 소비되곤 한다. "넌 뭐가 되고 싶니?."라는 추상적인 질문에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면 생각이 없는 혹은 야망이 없는, 꿈이 없는 사람으로 비치곤 했다.
잘하는 게 곧 적성인 줄 알고 살았다.
그래서 글을 쓰고, 토론하고, 계획을 세우고 아이디어를 내고, 문제를 해결하고, 언어를 습득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 일은 비록 꿈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성과를 냈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입사해
승진도 꽤나 빨랐다.
육아휴직을 한 지금, 직장에서의 기억을 돌아보면 끊임없이 무언가를 했던 기억뿐.
지시하고, 피드백을 주고, 상황을 정리하고 갈등을 조정하고, 효율적인 업무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 직장이라서
적용 가능한 나의 적성이었음을 깨닫는다.
육아는 갑자기 시작됐다.
아이의 10개월을 앞두고 있는 지금 그 당시 나는 육아가 정확히 뭔지, 아니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육아는 경험해보지 않고는 알 수 있는 성질의 단어가 아니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달다, 짜다, 싱겁다, 맵다 등등의 사전적 의미들도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인데 나는 사전 속 상상 육아를 떠올리며 뜬구름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육아를 알았지만, 진짜 육아는 알지 못했다.
진짜 육아는 혹독했다.
처음 한 달은 더욱 그러했다.
잠을 재우지 않은 것이 왜 고문인지를 실감했고
약간의 강박 그리고 넘치는 감수성 거기에 감정 기복도 심해 음악 한곡, 영화 한 편의 여운에도 오래 잠들지 못했던 나는, 소리 없이 가라앉았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하염없이 사람 구경을 하거나 무작정 나가서 비를 맞거나 아주 먼 거리까지 자전거를 타거나 벤치에 앉아서 시를 쓰거나
혼자만의 방법과 시간으로 치유되던 널뛰는 감정들은 비워지지 못해 켜켜이 쌓여갔다. 그리고, 그 넘치는 감정들을 미처 주워 담을 새도 없이 자꾸만 아침이 왔다. 나는 정리되지 못한 그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또다시 육아를 했다.
문득, 분노가 스치고 그 분노에 대한 놀라움은 죄의식을 남기며 나를 옭아매었다. 사랑하는 내 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던 순간순간들.
뭐든지 잘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육아는 정말 적성이 아니었을까 손톱을 잘근.
불안하기도, 초조하기도, 무기력하기도.
때때로 한꺼번에 휘몰아친다.
하지만 그러한 분진들이 가라앉고 나면 내 안에서 점점 몸집을 불려 가는 동그란 사랑이 다시 고개를 든다.
내 아이.
내 아들.
그 작고 소중한 아이에게 붙은 세 글자의 이름.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만들어 부르는 바로 그 이름. 이전의 나의 삶에는 없었던 그 단어. 그 목이 메는 단어를 온전히 실감하는 바로 이 시간.
이미, 나는 해낼 수 없을 것 같던 일들을 해내고 있다.
적성이 아니면 뭐 어때.
잘하지 못하면 뭐 어때.
지금 차오르는 이 마음 하나로 충분하다.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