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유기체처럼 팽창한다. 도시 주변이 개발되면 주변부와 중심지의 관계가 역전된다. 주변부가 화려하게 변신하면서 중심지는 구도심, 원도심으로 불리며 정체되어 버린다. 제주도 그렇다. 현재 제주는 두 개의 도심으로 나뉘어 있다. 제주의 강남이라 불리는 노형동을 중심으로 한 신제주와 제주의 오래된 원도심 구제주.
공항에서 남쪽으로 십 여분 거리에 있는 신제주는 고층 아파트와 대형 마트, 병원, 학원 등 모든 편의시설이 몰려있다. 아직 해외여행이 활성화가 되지 않았고 제주가 신혼여행지로 각광받던 시절, 제주 유명 호텔이나 편의시설은 모두 원도심에 몰려 있었다.
제주 도청과 지역 상권이 모두 신도심으로 옮겨간 뒤 이곳은 한동안 활력 없는 구도심으로 전락해 버렸다. 주민들조차 발길이 뜸한 이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2014년부터 하나둘씩 문을 연 아라리오 뮤지엄이다. 천안을 필두로 서울, 중국 상하이에 지점을 둔 아라리오 뮤지엄은 제주 시내에서 영화관, 모텔 등 버려진 상업용 건물들을 인수, 리모델링한 뒤 전시 공간 네 곳을 오픈했다.
부동산 사업가에서 ㈜아라리오의 설립자로 변모한 김창일 회장은 씨킴이라는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이자 세계 100대 미술 컬렉터이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적도 없지만 2000년대 초 영국의 yBa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면서 주목을 받은 그는 중국현대미술 작가들과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을 후원하고 작품을 수집했다. 2002년에는 천안 시외버스 터미널 곁에 갤러리 건물을 지어 조각광장을 만든 이후 무한증식 해왔다.
김창일 회장은 2006년 제주 하도리에 아라리오 창작 스튜디오를 오픈해 전속 작가들을 후원해 왔다. 이후 제주 시내의 상업시설이 족족 중국인 소유로 넘어가는 것을 보다 못한 그는 버려진 건물들을 인수해 문화 공간으로 되살려 도민들에게 돌려줬다.
아라리오 뮤지엄들의 공통점은 기존 건물의 원형을 최대한 유지해 그것들이 지닌 ‘역사적인 가치’를 최대한 살려두고 있다는 점이다. 2015년에는 등록문화재 제586호로 지정된 한국 현대건축사의 거장 고 김수근(1931~1986)이 설계한 공간사옥이 경영난에 처하자 이를 매입해 신개념의 미술관으로 재탄생시켰다. 제주에 있는 아라리오 뮤지엄들은 한 때 지역민들의 소소한 문화 공간, 휴식 공간이었던 점에 의미를 두었다. 여기에 현대미술의 ‘문화적 가치’를 더해 과거와 현재가 얽히며 교차하는 특색 있는 문화공간이 탄생했다.
오 층 건물인 탑동시네마는 1999년 제주 최초의 복합상영관으로 도민들의 관심과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제주 곳곳에 대형 멀티플렉스 상영관들이 생겨나자 이용객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2005년 폐관되었다. 유리창이 깨진 채 십 년 가까이 방치되었다가 2014년 10월,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란 다소 긴 명칭으로, 빨간 옷을 갈아입은 전시공간으로 재탄생했다. ‘탑동시네마’란 예전 명칭을 그대로 살렸듯이, ‘창조된 보존’의 개념을 구현했다.
과격하게 리모델링하지 않아 노출 콘크리트를 그대로 드러낸 내부와 군데군데 벽을 헐다 만 거친 마무리에다 내부 골재가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전시장을 돌다 마주치게 되는 낡은 파이프와 계단,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한 타일과 ‘1999년 행우회 일동’이라는 한자로 쓴 로고가 찍힌 낡은 거울은 이곳이 지금, 현재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음을 일깨워준다.
이런 옛 흔적들과의 조우는 탑동시네마를 이용해 본 적은 없는 외지인에게도 노스탤지어를 선사해 준다. 하물며 소싯적 영화를 보러 이곳을 드나들었던, 지금은 중장년이 되었을법한 현지인들은 지난날의 추억을 되새기며 많은 이야깃거리를 떠올릴 것 같다. 한 때 네 개 상영관에 793석의 관람석을 보유했던 복합상영관이었던 만큼 공간도 넉넉하고 8미터 높이의 거대 전시실에 전시된 대형 설치작품들은 시각적으로 시원스러운 느낌을 준다.
아라리오 탑동시네마는 <바이 데스터니>라는 제목 하에 ㈜아라리오의 컬렉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표를 끊고 입장하면 스위스 작가 우고 론디노네의 <유성의 어두운 흐름을 지나서>(2004)를 만나게 된다. 100년 넘은 올리브 나무를 레진으로 떠서 전시장 한가운데 두고, 벽면의 스위치를 누르면 천장에서 종이로 만든 눈이 쏟아지며 한겨울의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크리스털 구슬로 만든 사슴 가족 시리즈로 유명한 코헤이 나와, 백남준의 작품은 물론 씨킴(Ci Kim)이라는 예명으로 작품활동을 하는 김창일 회장의 작품도 볼 수 있다. 100마리가 넘는 소가죽으로 만든 10m가 넘는 중국 작가 장후안(張洹)의 ‘영웅 No.2’도 눈에 띈다.
특히 2~3층을 차지한, 인도 작가 수보드 굽타의 <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는 전시장의 백미이자 총길이만 20미터가 넘는 대형작품. 인도를 상징하는 오브제들을 배 안에 가득 싣고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어 아슬아슬한 느낌을 자아내 낸다. 수보드 굽타의 작품 바로 앞에는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실크스크린 이미지가 나란히 걸려 있어 성격과 맥락이 전혀 다른 두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지하 1층, 지상 4층에 달하는 전시장을 둘러보고 아트샵과 카페가 있는 5층으로 꼭 올라가 보기를 바란다. 자연 채광이 비추는 탁 트인 창과 널찍한 카페, 기념품샵이 방문객을 반기기 때문이다. 특히 2001년 조성된 탑동 테마거리와 탑동 바다가 한눈에 펼쳐지는 5층 창가는 미술관의 최고 명당이다. 그동안 제주도에 미술관들이 적잖이 지어졌지만 사실상 내부에서 바다가 보이는 전망을 갖춘 미술관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여느 미술관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소장품과 쟁쟁한 작가들의 세련된 미술작품으로 인해 잠시 공간감을 잃었던 관람객들도 여기서만큼은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날씨에 따라 변화무쌍한 표정을 보이는 탑동바다와 그 위를 쉴 새 없이 오르내리는 비행기들의 행렬은 여기가 제주임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나오면 잊지 말고 꼭 뒤편 건물로 향해야 한다. 아라리오뮤지엄 탑동바이크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탑동바이크샵은 이름 그대로 예전에 바이크 샵이었던 공간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건물 전면에 빨간 페인트로 칠한 탑동시네마완 달리 이곳은 건물의 골격은 살리면서 구멍 뚫린 빨간 철제로 감쌌다. 현재 제주에 오픈한 아라리오뮤지엄들 중 가장 규모가 작은 곳이다.
제주공항에 내려 여행 떠나기 직전, 애월해안도로 쪽이 아닌 동부 지역을 여행한다면 탑동이나 산지천 쪽에 있는 아라리오 뮤지엄을 두어 군데 들릴 것을 제안한다. 본격적인 여행에 앞서, 제주에서 가장 세련된 공간에서 전 세계 유명 작가들의 개성 넘치는 현대미술작품을 보며 워밍업 하는 것은 어떨까. 더불어 탑동시네마나 동문모텔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제주도민이라면 꼭 방문해 보길 권한다.
*졸저 <제주뮤지엄여행>(더블엔, 2016)에 실린 내용을 재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