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진에 붙잡아 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제주 서귀포 성산읍 삼달리는 올해 초 종영한 JTBC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다. 기대와 달리 드라마 배경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그곳에 ‘김영갑 갤러리’가 있다. 원래 이름은 한라산의 옛 이름을 뜻하는 ‘두모악’을 딴 <두모악 갤러리>였는데 이 갤러리를 일군 사진작가 고 김영갑 사진작가 덕분에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이 정식 명칭으로 되었다. 코로나 이전만 해도 이 갤러리는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명소였다.
김영갑갤러리는 원래 초등학교 건물이었다. 1967년 개교한 구 신산교 삼달분교였는데 1998년, 제주도에서 예산문제로 소규모 학교들 간의 통폐합 바람이 불 때 폐교되었다. 2001년 김영갑 작가에게 임대되어 2002년 갤러리로 거듭난 것이다.
건물 내부에 전시된 김영갑 작가의 사진들도 훌륭하지만 폐교를 갤러리로 변모시킨 성공사례로 꼽힌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잘 가꾼 자연문화유산' 부문에 선정될 정도로 농촌 폐교시설을 지역 문화의 구심점으로 끌어올린 모범 사례로 평가받았다.
지난 여름 청천벽력 같은 뉴스가 들려왔다. 김영갑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20주기를 1년 남겨두고 갤러리가 코로나를 비롯한 여러 사정으로 운영난을 겪으며 임시 휴관에 들어갔다고 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공식적으로 임시휴관이지만 마땅한 지원이나 대안이 없으면 영구 폐관도 고려 중이라는 상황이었다. 필자도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갤러리 1순위로 꼽을 정도로 남다른 곳이고 그 곳을 데려간 지인들도 이구동성으로 좋아하던 곳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의아했다.
코로나19로 힘들었던 것도 있지만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의 취향에는 안 맞을 수 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20년 전만해도 제주에 감각적이고 특이한 미술관이나 전시공간이 많지 않았다.
요즘은 제주 전역에 LED나 인스타에 자랑할만한 현란한 포토존으로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곳들이 많아졌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갤러리 돌담 하나, 풀 한포기 하나에도 작가의 손길과 영혼이 오롯이 서려 있다는 점을 알면 김영갑갤러리가 다시 보일 것이다.
김영갑 작가는 충남 부여 출신이다. 1982년부터 제주를 드나들며 사진 작업을 했는데제주 풍광에 매료되어 1985년부터 아예 제주에 정착을 했다.
가진 것이라곤 맨 몸뚱이와 사진장비밖에 없는 작가에게 제주 생활은 그야말로 고행 길이었다. 끼니를 굶는 일은 예사였고 기거할 곳을 찾아 중산간 오지로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야만 했다. 필름에 곰팡이를 피우는 한 여름철 섬의 습기는 사진작가인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설상가상으로 장마철 수해를 입어 작업실 겸 숙소로 쓰던 방이 물에 잠기는 바람에 전시회를 앞두고 잔뜩 사둔 필름과 인화지 등 고가의 사진장비들을 몽땅 버리는 일도 겪었다.
외지인을 대하는 마을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이 동네 저 동네를 전전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4.3때 제주도민들을 대량 학살한 육지 경찰들과 서북청년단의 만행이 사람들 뇌리에 생생해서 제주민들은 육지인들을 향한 마음의 문을 꽁꽁 잠그고 살던 시절이었다. 피사체를 찾아 들판을 헤매는 그를 간첩으로 오인하고 경찰에 신고한 주민도 있었고 젊은 사람이 라면만 먹고 사는 모습이 보기 힘들어 방을 비워달라는 집주인도 있었다.
예측 불허하는 섬의 자연환경에 적응하고 그보다 더 속내를 알 수 없는 마을사람들과 말트기에 성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원하는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순환을 읽어내며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 것처럼 섬에 정착하기 위해 작가는 외로운 노인들의 말벗을 자청했다. 그들의 살아온 내력과 구구절절한 사연을 경청하며 소통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도 서서히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 들였다.
오름에서 태어나서 오름으로 돌아간다는 제주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무덤도 보이고 동자석도 보이고 무엇보다도 풍향과 풍속을 가늠할 길 없는 제주의 바람이 보였다. 이렇게 오름에 밀착된 지역민들의 삶을 관찰하다 보니 그의 작품 소재 대부분이 '제주 오름’이 되었다.
제주 하면 해변이나 폭포, 한라산이 다 인줄 알았던 사람들이 예전엔 눈길도 주지 않았던 오름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특히 작가가 생전에 애착을 갖고 작품으로 남겼던 용눈이 오름과 다랑쉬 오름이 지닌 곡선의 미학, 날씨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제주의 빛, 바람, 색의 황홀한 마법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름 사진의 거장’으로 제법 이름이 알려질 무렵, 42세의 나이로 희귀병이자 난치병인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주변에서 좋은 치료 받으며 쉬라는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생애 마지막 3년은 폐교를 꾸며 갤러리를 짓는데 소진했다. 온몸이 시멘트처럼 굳어져가서 숟가락 하나 들기 어려운 몸으로 죽을힘을 다해 직접 돌을 나르고 야생화도 심었다. 그렇게 해서 죽은 공간은 다시 살아 숨 쉬는 예술의 전당으로 탈바꿈 시켰다.
갤러리 두모악을 처음 찾아갔을 때는 갤러리 앞마당에 놓여있던 감나무에 주황색 열매가 주렁주렁 내걸린 햇살 가득한 가을날 오후였다. 2005년 5월 29일, 김영갑은 천 개의 바람이 되어 그토록 사랑했던 제주의 품에 영원히 안겼다. 작가의 유골은 한 줌의 재가 되어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갤러리 앞뜰에 심어 놓은 감나무 밑에 뿌려졌다.
한때 학교 운동장이었던 갤러리 앞뜰은 이름 모를 가을꽃들과 현무암 돌담이 햇살에 반짝이고 발 밑에는 뽀득거리는 화산송이가 밟혀 오감을 즐겁게 해준다. 미술관이 아닌 작은 곶자왈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이곳은 갤러리 정원이기도 하지만 고인의 영혼이 곳곳에 스며든 무덤이기도 하다. 작가의 유언대로 정원 곳곳에 그의 유해가 뿌려졌기 때문이다.
두 개의 교실을 이어붙인 듯한 갤러리에 들어서면 그가 남긴 20여 만 장의 작품 중 일부를 선정해 전시되어 있다. 오름을 비롯해 제주의 풀, 나무, 바다, 돌을 담은 풍경들은 하나같이 바람을 머금고 있었다. 몽글몽글 피어오른 아침안개나 비에 젖은 풍경을 마주하고 있자면 가랑비에 옷이 젖어들 듯 작가의 상념과 고독까지 오롯이 피부 속까지 스미는 느낌이다.
작가가 별세한 지도 이 십 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갤러리가 있는 삼달리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김영갑이 정착하기 전 까지만해도 삼달리는 제주 동쪽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에다 전기도 가장 늦게 들어올 정도로 낙후된 오지 마을이었다.
갤러리가 생긴 뒤곳곳에 문화공간이 생겨나고 예술가들이 하나 둘씩 모여 정착하는 마을이 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바람처럼 불쑥 마을을 찾아온 이방인이 마을 곳곳에 문화 예술의 씨앗을 뿌리고 떠난 셈이다.
김영갑갤러리가 없는 삼달리는 내겐 상상할 수도 없다. 올해 10월 31일까지 휴관 한다고 했는데 부디 이 곳을 사랑하는 세인들의 관심과 성원으로 인해 재개관하기를 바랄 뿐이다. 가을이 저물기 전에 갤러리가 다시 문을 열면 그곳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