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동문시장은 광복 직후 형성된 동문상설시장으로 시작된, 제주시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재래시장이다. 제주 특유의 먹거리와 특산물, 신선한 수산물로 인해 제주 여행객들도 많이 찾아와 늘 북적인다.
제주 산지천, 출처 : VISIT JEJU
동문시장 인근에는 산지천이 있다. 산지천은 한라산 북쪽 해발 720미터에서 발원해 제주 원도심을 흐르다 건입동 제주항을 통해 바다로 나가는 물이다. 또한 영주 10경(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10곳)중 하나로 원도심의 상징이었다. 100년 전만 해도 물이 귀한 제주에서 주민들에게 식수원과 빨래터, 목욕터를 제공해 준 고마운 곳이었다. 은어, 장어 등 물고기도 많이 잡혀 아이들에겐 최고의 물놀이 장소였다. 사람들이 모여드니 자연스레 상권도 형성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 산업화의 바람이 불자 이곳에 상가 건물들이 들어서며 생활하수와 쓰레기가 쌓이면서 오염, 악취 등 문제가 생기자 청계천처럼 복개가 되었다. 2002년 자연형 하천으로 다시 복구되면서 시민들의 휴식처로 재탄생했다.
산지천에서 길 건너편 상가 밀집지역을 바라보면 빨간 건물 두 개가 보인다. 바로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 I, II로 불리는 곳이다. 이 지역의 건물들은 모두 7,80년대에 지어진 듯 노후되었고, 도로 폭도 좁고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다.
2014년 가을에 개관한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 I은 산지천 맞은편 골목에 들어가 있지만 빨간 건물로 인해 눈에 쉽게 띈다. 성인당구장, 천막사, 페인트가게가 들어서 있는 낡고 허름한 회색조 건물이 양 옆에 들어선 까닭에 더욱 돋보인다.
5층 규모의 동문모텔 I이 들어선 골목에 한 뼘만 들어가면 ‘미술관 옆 동물원’만큼이나 뜬금없는 단란주점과 모텔 입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골목 일대가 오래전부터 뱃사람들이 머물던 숙박업소들과 유흥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뮤지엄 간판은 건물 외벽 중앙에 겨우 알아볼 정도의 크기로, 그것도 영어로 쓰여 있어 아무 정보 없이 골목에 들어선 사람들은 단란주점 건물인 줄 알고 들어갈 것 같다.
탑동에 있는 아라리오 못지않게 이곳에서도 관객들은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되어있다. 예전 모텔의 페인트 벗겨진 벽, 보일러 오래된 목욕탕 타일들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층 중앙 공간에는 아라리오의 소장품인 독일 신표현주의 작가 A.R. 펭크의 회화 ‘독수리와 원숭이’(1985)와 영국 작가 앤서니 곰리의 설치 작품 ‘우주의 신체들 I’(2001) 나란히 전시되어 있어 다양한 층위의 현대미술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허름한 모텔공간에서 국제적으로 명성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컬하게 다가온다.
깔끔하게 페인트칠된 흰 벽에 조명으로 충만한 기존의 화이트 큐브 미술관에 대한 고정관념을 이곳에선 모두 떨쳐버리는 편이 좋다. 특히 2층 전시실은 동문모텔 개관 전을 위해 작가들이 제주에 머물며 용도폐기 된 옛 공간에 자신들만의 상상력을 한껏 곁들여 흥미를 돋운다. 예전에 쓰던 물품을 이용해 옛 동문모텔의 흔적들을 테마로 한 전시실로 꾸몄다. 특히 일본 작가 아오노 후미아키가 동문 모텔에서 쓰던 매트리스와 문짝, 침대 머리 등을 소재로 한 '동문모텔에서 꾼 꿈'과 모텔에서 쓰던 수조를 이용한 한국작가 한성필의 '해녀시리즈'가 눈길을 끈다.
19명 작가의 61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설치작품 위주라 최소한의 조명만 밝히고 있고, 작품재료의 특성상 버려진 폐가에 온 듯한 느낌이 들어 혼자 오면 무서울 수도 있다. 게다가 탑동 아라리오뮤지엄들과는 달리 아이를 동반하기에는 버거운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3층에는 그로테스크하고 기괴한 설치작업으로 유명한 채프만 형제(Jake and Dinos Chapman)의 19금 작품으로 꾸며졌다.
1997년, 런던은 물론 전 세계 미술계를 뜨겁게 달군 <센세이션(sensation)>전에서 선보여 이미 ‘악명’을 드높인 ‘채프만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코와 입이 생식기나 항문으로 변해있고, 팔다리가 엉키고 상체가 서로 들러붙은 실물크기의 돌연변이 아이들이 대거 등장하는 <끔찍한 해부>는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면서 현대문명에 대한 고발을 암시하고 있다.
관객들이 이 작품들을 보고 상당한 불쾌감이나 역겨운 감정이 들었다면 작가의 의도는 성공한 것이다. 관객 눈앞에 폭력과 잔혹행위를 날 것 그대로 들이댄 채프만 형제야말로 충격과 공포도 현대미술의 일부분임을 깨닫게 해주는 미술계의 악동임에 틀림없다
동문모텔I을 뒤로하고 중앙로로 나서면 북쪽으로 1분 거리에 동문모텔 II가 있다. 2015년 4월 1일 네 번째로 개관한 이곳은 제주 아라리오뮤지엄 네 곳 중 가장 맵시 있고 날렵한 자태를 자랑한다. 1975년 지어진 대진모텔이었는데 2005년 모텔 폐업 후 방치된 상태였다. 건물을 그대로 살린 채 리모델링해, 1층에는 커피숍과 아트숍이 들어섰고 2층부터 5층까지 4개 층 공간은 모두 전시공간으로 꾸며졌다.
이곳은 주로 국내 젊은 작가를 소개하는 곳으로, 그동안 청년작가들 전시가 목말랐던 제주도에 한국 현대미술의 젊은 피를 수혈한 곳이다. 이를 증명하듯, 개관전 <공명하는 삼각형>에서는 영화·미술·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 온 박경근, 정소영, 잠비나이, 이주영이 영상, 설치, 사운드 아트 등을 선보였다. 자유롭고 신선한 발상으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젊은 작가들의 전시가 주로 열린다.
동문모텔을 나오면 건물 왼편 골목 안쪽에 유래비가 세워져 있는데, 예전 원도심의 역사를 말해준다. 동문모텔II 인근은 바로 옛 건입동사무소가 있던 터라고 한다. 그 기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 “1932년 마을 공회당이 들어선 뒤 야학소를 열어 문맹퇴치운동과 함께 항일정신을 일깨웠던 곳”이라고 일깨워 준다.
“한국전쟁시에는 군인주둔소, 피난민 수용소로 사용되었으며 2007년 10월 건입동사무소가 신축 이전되기까지 건입동사무소로 이용”되었다고 적혀 있다. 한 때는 문맹퇴치의 장소였던 곳이 이제는 도민들로 하여금 현대미술의 가독성을 높이는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시네마-탑동바이크샵과 동문모텔Ⅰ-Ⅱ는 각기 이웃이고 탑동과 동문의 전시장은 걸어서 10여 분 거리다. 통합 입장료로 4군데 모두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