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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Oct 27. 2024

동아대학교 박물관-1920년대 부산의 화양연화

미술관이 된 옛 건물 9


우리나라의 웬만한 종합대학은 자체적으로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연세대학교에서 1924년부터 자체 박물관을 보유하기 시작하여, 1930년대에 이르면 이화대학교, 고려대학교 등에서도 잇따라 유물을 수집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이들 대학 박물관의 소장품과 전통도 학교 명성에 걸맞게 수준급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지 않아도 캠퍼스 안에서 손쉽게 국보급 유물들을 접할 수 있으니 해당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과연 재학생들 중 몇 프로가 박물관을 이용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서울 소재 역사가 오래된 대학 박물관들도 훌륭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전국 대학 부설 박물관 중 단 한 곳을 꼽으라면 단연코 부산에 있는 동아대학교 박물관을 추천하고 싶다. 일단 소장 유물의 다양함과 희소성, 박물관의 규모와 동선의 짜임새, 그리고 박물관 건물이 지닌 역사성과 외관에서 풍기는 기품이라는 선정 기준으로 볼 때 동아대 박물관은 이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충족하고 있는 곳이다.

 동아대박물관이 있는 토성동 일대는 과거 부산의 원도심. 한 때는 허허벌판이었다가 1923년 진주에 있던 경남도청이 이전해 오는 바람에 마을이 생기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번화가였다. 구덕로에 진입하자마자 한눈에 3층 벽돌 건물이 확 들어와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대학 박물관은 캠퍼스 안으로 진입해야 찾을 수 있는데 대로 한복판 눈에 잘 띄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도 강의실로 진입하려면 박물관 건물을 지나야 한다. 처음부터 박물관 용도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경상남도청사로 지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동아대석당박물관 홈페이지


오후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붉은 벽돌건물은 파란 여름하늘과 대조를 이뤄서인지 더욱 위용 있게 돋보이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1925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라 유럽의 어느 도심에 놓여있는 착각이 들 정도다. 원래 관공서 용도로 지어져 완벽한 좌우 대칭에 정면에 돌출한 아치형의 포치를 지닌 건물의 위용은 고층빌딩이 즐비한 요즘에도 권위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양쪽에 열을 지어 즐비하게 늘어선 석조물들 덕분에 원래 건물이 지녔던 무게감이 상쇄된 느낌이다.


경남도청사였던 이곳은 한국 전쟁 때는 임시 수도 정부 청사로 사용되었다. 1953년 전쟁이 끝나고 다시 도청사로 활용되다가 1983년 경상남도 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하면서 검찰청, 법원으로 쓰이다가 2002년 동아대학교에 매입되었다. 같은 해 이 건물은 9월 박물관 건물이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다 2009년에 이르러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목조보살좌상과 김홍도의

박물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특별 수장고, 행정실. 세미나실로, 2층은 민속실, 서화실, 불교미술실, 도자기실, 고고자료실 등 유물 전시실이, 3층은 부산임시수도 정부청사 기록실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대학 부속 박물관이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국립박물관 수준을 뛰어넘는다. 국보 2점과 보물 11점, 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 9점 등 진귀한 유물 3만 여 점 소장하고 있다. 대학 박물관 중 동국대 박물관 다음으로 귀중한 국보급 문화재를 많이 보유한 곳이다. 이렇다 할 공공 박물관이 많지 않은 부산에서 지역 주민들을 위한 복합 문화공간이다. 때마침 방학이라 그런지 박물관엔 삼삼오오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광개토왕비 복제본

일단 내부에 들어서면 널찍한 로비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과거에 도청으로 지어진 건물이어서 그런지 이 정도면 대학 부설 박물관 치고는 상당한 규모다. 본격적인 전시 관람을 위해서는 2층 전시장으로 올라가야 한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 바로 옆에는 복층을 차지한 광개토대왕비 복제본이 놓여 있다. 긴 복도를 중심으로 디귿자 형으로 구성된 2층 전시실은 고고실, 도자실, 와전실, 불교미술실, 서화실, 민속실 등 총 6개의 전시관으로 나뉘어 있다. 동아대학교 창립자인 석당 정재환 박사가 수집한 각 지역의 문화재들이 모여 있다.


우선 고고실에서는 낙동강, 남해안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알 수 있는 구석기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독특한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부산 영선동 패총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덧띠문토기(보물 제597호)는 신석기시대 전기 것으로 입술 부분에 덧띠문이 둘러진 독특한 형태의 그릇이다.

부산 동래 복천군 고분에서 출토된 말머리장식뿔잔(보물 제598호)과 삼한시대 제사장이 사용한 팔각형 별 모양의 팔주령의 섬세한 세공도 관람객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도자실에서는 고려청자는 물론 분청사기, 조선 백자 등 시대별 도자공예의 다양한 기법과 모양을 살필 수 있다.

동궐도

서화실에서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준이다. 우선 경복궁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호)는 16폭 병풍에 궁궐과 산수가 어우러진 조감도식 궁궐배치도로 그 규모와 정교한 붓놀림 면에서 장관을 보여준다. 경희궁 전경을 그린 <서궐도>(보물 제1534호)는 고려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두 박물관이 연계해 <서궐도>와 <동궐도>가 한 자리에서 선보인다면 일제 강점기 대규모로 훼철당한 고궁의 모습과 스케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영남기행화첩, 사진 출처: 동아대석당박물관

그 외에 조선 후기 헌종 때 도화서 화원들이 헌종의 어머니 조대비의 40세 생신 잔치 모습을 8폭 병풍에 그린 <조대비사순칭경진하도병>(보물 제732호)와 검은 비단에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수놓아 만든 8폭 병풍인 <초충도수병>(보물 제595호) 앞에 서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이, 맨드라미, 원추리, 수박, 가지 등의 식물과 곤충들이 새겨진 <초충도수병>은 회화작품보다 더 정교하고 섬세해 미술사와 자수 공예사에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진재 김윤겸(1711~1775년)이 부산과 합천, 거창 , 함양, 산청 등 영남지역 명승지를 유람하고 그린 14장의 <영남기행화첩>(보물 제1919호)은 동아대 박물관에서 놓칠 수 없는 영남의 보물이다.

민속실에서는 옛 조상들의 의식주와 관련된 민속품들 뿐 아니라 대한제국 시기의 유물 등도 볼 수 있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순정효왕후가 사용하던 나전가구들은 호화롭기 그지없다.

3층은 부산 임시수도정부청사 기록실로 이용되고 있다. 1925년 경남도청, 1950년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 2000년대 이후 복원 당시 수습한 각종 건축 자재와 장식 그리고 지금은 헐려 없어진 부속건물 무덕관의 장식 기와 등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일제강점기 전국 각지에 지어진 도청건물의 분포도를 사진과 함께 볼 수 있다.


1920~1930년대 일본인들은 조선 방방 곡곡 12곳의 도시에 도청을 지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대부분의 근대건물들이 그렇듯이, 관공서 건물들은 식민통치 지배자의 우월성을 표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시되었다. 따라서 동아대 박물관 건물 역시 당시 유행했던 모더니즘 건축에 식민지배자의 권력의 크기를 건물에 재현하려는 정치적 역할도 수행했다.

박물관 밖으로 나가면 옥외 공간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부산시 지정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려말선초에 제작된 삼층석탑 및 석등, 석조인 들이 마실 나온 지역 주민들과 함께 어우러져 고즈넉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잠시 벤치에 앉아 늦여름 오후 매미 소리를 들고 있자니, 왠지 저 건물이 지어질 무렵 시간과 맞닿아 있는 양 아득한 느낌마저 든다.


소장품의 면모를 볼 때 웬만한 도립, 시립 박물관 수준을 뛰어넘는 동아대박물관이 현재의 위상을 지니기까지는 동아대 창립자인 석당 정재환 박사와 그의 아들 한림 정수봉 박사의 공로가 컸다. ‘부산의 간송’이라 불릴 만큼 경상도 지역의 문화재 수집가로 유명한 이들은 광복 후와 한국 전쟁 당시 부산항을 통해 일본이나 해외로 유출되는 문화재들을 적극 수집했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유출되어 부산항에서 출항을 대기하던 유물들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처럼 시기별, 지역별로 다양한 전시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모인 문화재들은 1959년 학교 도서관 건물에 전시되었다. 당시만 해도 부산 최초의 박물관이었다고 한다. 1966년 구덕 캠퍼스에 단독 전시 공간을 마련한 석당박물관은 2009년 부민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현재의 위치에 안착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곳은 일제강점기 경남도청과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정부청사가 위치했던 역사적 의미까지 보태졌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대학교 박물관은 부산의 자랑거리이자 최고의 대학 박물관 중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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