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앞으로 넘어지듯
나는 어릴 때 부터 죽음을 무서워한다. 정말 무서워한다. 버스를 타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면 순식간에 아득한 두려움으로 빠져든다. 한번 빠져들면 애써 다른 생각을 하는 것 외에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최근에도, 대학시절에도, 중고등학생 시절에도, 심지어 초등학생 시절에도 그런 아득한 두려움에 몸서리 쳤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많은 책들을 읽어봤다. 불교서적, 철학책, 대학 전공이었던 심리학과 관련된 교과서나 교양서적, 수많은 인터넷 블로그나 칼럼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권을 꼽자면 알베르까뮈의 시지프 신화였다. 첫문장부터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뿐, 바로 자살이다‘라고 시작하니 기억에 남지 않을리가. 대학생 시절 처음 읽고, 30대 후반에 다시한번 읽은 이 책은 죽음에 대한 나의 유별난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읽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이 책을 ‘그냥 존나게 살아’ 정도로 요약 할 수 있겠다. 두렵겠지. 이게 다 뭔가 싶겠지. 허무하겠지. 하나도 말이 안되는 거 처럼 느껴지겠지. 그걸 다 받아들이고, 그냥 존나게 살아. 이 책은 나의 두려움을 해소해주진 않았지만, 그 두려움을 안고 사는 방안을 마련해주었다. 그 기념으로 나는 이 책을 2번째 읽고나서 어깨에 커다란 타투를 새겼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만나보게 된다. 그들은 대체로 죽음에 대해 에피쿠로스적인 입장을 갖는다. 죽으면 어차피 내가 없어서 아무것도 느끼지도 인지하지도 못하는데 뭐가 무섭냐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매우 격하게 공감하고 완전히 동의한다. 문제는 그런 공감과 동의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사라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답답한 노릇이다. 무서워할 일이 아니라는걸 머리로는 알지만, 몸은 벌벌 떨고 있으니말이다.
한편으로 40여년의 인생을 살면서 ‘아 이런 느낌인건가?’라는 힌트를 얻을 수 있었던 순간들이 없었던건 아니다. 대체로 그런 순간들은 내 알량한 이성이나 사고력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거나 오히려 방해가 되는 순간, 내 몸뚱아리나 감정이나 감각 같이 그 밖의 것들이 온전히 부각되는 순간들이었다. 이성, 사고보다 육체, 감정, 감각이 부각되는 순간에 죽음으로부터의 두려움을 해소하는 힌트를 얻었다는 점은 내가 읽은 많은 책들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많은 불교서적이나 켄윌버 같은 철학자들의 책을 보면 과거나 미래에 얽매여 현재를 등한시하는 습관을 지닌 사람들이 나처럼 죽음을 두려워한다고들 한다. 과거는 온전히 ‘기억’의 산물이고 미래는 온전히 ‘사고’의 대상인데, 죽음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미래를 경험하지 못하는 상태이므로 과거와 미래에 얽매일 수록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골자다. 그래서 현재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기억이나 사고가 아닌 그 밖의 것들, 그러니까 감각이나 감정에 무게를 늘려가라는 조언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내가 경험했던 힌트들도 대체로 이런 조언과 같은 결을 지녔다.
아마도 처음으로 그런 힌트를 경험한 것은, 이 모든 책을 읽기 전이었던 대학생시절, 당시 유행하던 유럽 배낭여행에 가서 번지점프를 했을 때 였을 것이다. 당시 배낭여행객들 사이에서는 스위스를 여행할 때 알프스의 광활한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활동을 하나쯤 해보는 것이 관례처럼 여겨졌다. 레프팅, 스카이다이빙 등 여러 선택지가 있었는데 나는 왜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번지점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찾아간 곳은 약 80미터 쯤 높이의 번지점프대였다. 내 앞 순서였던 사람은 점프대에서 뛰어내리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몸이 떨리기도 했다. 스위스인 직원들은 이렇게 긴장하면 다쳐서 안된다며 충분히 시간을 주었고 그 사람은 결국 고성을 지르며 뛰어내리는데에 성공했다.
이후 내 차례가 돌아와 팔뚝정도 두께의 끈을 발목에 묶었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강시처럼 콩콩콩 뛰어 점프대 끝자락으로 향했다. 구체적인 영어 단어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직원이 나에게 알려준 ‘안전하게 뛰어내리는 법’을 내가 이해한대로 옮기자면 이러했다.
몸에 힘을 주지 말고,
뛰어오르거나 뛰어내리려 하지 말고,
그냥 앞으로 넘어지듯 몸을 맡겨라.
평소 겁이 많아서 독감예방주사를 맞을 때도 오만상을 찌푸리고, 길을 걷다 돌뿌리에 발이 스치기만해도 호들갑을 떠는 나였지만, 묘하게도 저 안내를 통해 번지점프대 직원이 나에게 어떤 행동을 권장하는지 느낄 수 있었고, 그냥 그대로 따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뜸을 들이지 않고, 쓰리 투 원 번지 소리에 맞춰 저 안내에 따랐다. 마치 막대기 하나가 서있다가 바닥으로 넘어지듯, 나는 80미터 높이의 번지점프대에서 스르륵 앞으로 넘어졌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순간은, 번지점프대 끝자락을 딛고있던 발끝이 허공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이었다. 중력에 의해 내 몸뚱아리가 점프대보다 아래로 향한 바로 그 순간. 온전히 허공에 몸이 나앉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 중력가속도 9.8 m/s^2 이 그대로 적용되지만 속도는 0인 그 상태. 아마도 내 평생 적어도 물리적 차원에서는 가장 위태로웠을 그 찰나에 나는 낯선 환희를 느꼈다. 그 환희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아마도 ‘자유로움’ 이었던 것 같다.
뒤따른 자유낙하의 시간, 내 발목을 묶은 끈의 탄성에 의해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오르던 시간, 이내 다시한번 찾아온 자유낙하의 시간 내내 나는 환호를 지르며 얼굴 가득히 웃음을 졌다. 무섭기보다는 기쁘고 즐거웠다. 그 몇초의 시간 동안 온몸의 감각이 생전 처음 겪어보는 자극들로 넘쳐났다. 실제로 벌어진 일은 한 찰나에 내 발이 허공으로 떨어지고 이내 몇초간 공간을 오르내리다 착지하게 된 것이지만, 나에게 남아있는 인상으로는 발이 허공으로 떨어지던 그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이어지고 뒤따른 시간들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만 같았다.
이 경험은 내 삶에 꽤 많은 영향을 끼쳤다. 겁이나고 막연히 움츠리게 되는 상황에서 과감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 그냥 앞으로 넘어지듯 몸을 맡겼던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 과감함이 문제를 일으킨 적도 물론 있었지만, 대체로 번지점프의 기억과 비슷하게 자유롭고 짜릿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원채 겁이 많고 소심한 성격이었지만 이런 과감함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하자 어느덧 나는 주변에서 꽤나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으로 비춰지게 됐고,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좋았다.
그 외 경험한 다른 힌트들대체로 이와 같이 ‘지금’, ‘여기’, ‘감정’, ‘감각’이 ‘과거’, ‘미래’, ‘이성’, ‘사고’를 압도하는 형태의 경험들이었다. 그 자세한 내용들은 차차 얘기하기로 하자.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죽음에 대한 유별난 두려움이 해소되거나 줄어들진 않았지만, 그 두려움에서 야기되는 문제나 불편함을 어느정도 보완할 수 있었다. 긴 시간동안 때때로 이런 힌트들을 경험하면서 그 사이에서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나름의 노하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런 노하우들이 이제 손에 잡힐듯 싶을 때 ‘마음챙김’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됐다.
나는 마음챙김(mindfullness)을 처음 알게됐을 때 앞서 내가 말한 ‘힌트’들의 속성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이었던 그 속성들을 한 단어로 치환하여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 말에 빠르게 빠져들었다. 관심이 없던 명상이란 것도 해보고, 요가 같은 운동도 시도해봤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에 능력이나 힘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최근 몇년간 내가 느끼기에 나 자신의 마음챙김의 힘이 키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깨달음이나 진리 같은 거창한 건 모르겠지만, 그냥 사는게 더 편해지고 나라는 사람이 더 유연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날이 왔다.
그날 아침은 그 전날과 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아이가 아침을 먹고 어린이집에 갈 채비를 하는 것을 도운 후,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출근을 하면 됐다. 평소와 같은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은 채 잠에서 깼고 방안의 공기도,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햇볕도 여느때와 다르지 않았다.
정말 크게 달랐던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나 자신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고 출근은 커녕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을 향할 의욕조차 없었다. 한없이 베게와 이불로 파고들었고, 마치 출생 전 어머니의 자궁으로 회귀하고 싶다는 듯 온몸을 움츠러들였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고, 아마도 때때로 몸을 떨었던 것 같다. 그 상태로 순식간에 대여섯시간이 지났다. 나는 그 시간동안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공황과 불안장애를 동반한 우울증이 그렇게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