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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몸이었다는 이야기

마음 챙김이 실패한 첫 번째 이유

알아차림 명상을 몇 개월간 해보던 과정에서 어느 날 문득 흥미로운 포인트를 발견한 적이 있다. 오늘은 그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명상의 가장 큰 방해꾼이자 알아차림 훈련의 첫 번째 과제인 ‘잡생각’은 생각의 일종이다. 생각이라 함은 내가 머릿속에서 언어를 활용하여 전개하는 이야기이다. 마치 말을 하듯 글을 쓰듯 이어지는 독백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도 하며, 방금 했던 생각에 대해 반박하거나 옹호하기도 한다. ‘생각’은 언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영어 공부를 할 때 ‘생각을 영어로 하기’ 같은 훈련방식이 성립할 수 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은 영어로 생각하기가 어렵다. 그러다 영어가 익숙해지면 영어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한편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거나, 또는 소리/촉각/시각을 알아차리는 것을 ‘인지’라고 할 수 있겠다. 만일 내가 나도 모르게 잡생각에 빠져있다면, 그 생각은 분명 내가 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생각 자체를 인지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귀는 언제나 소리를 듣고 있다. 완벽한 진공의 세계에 있지 않은 이상 우리의 고막은 어떻게든 진동하게 되고 그것은 우리의 청각 신경에 신호를 보낸다. 하긴 진공의 세계라 하더라도 심장은 뛰고 있을 테니 고막이 진동하지 않는 상황은 거의 없겠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소리를 인지하고 있지는 않다. 그 청각신경의 신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 소리를 ‘인지’ 하지 않는 것이다. 알아차림 명상, 그것은 주의를 기울여 ‘인지하는 대상을 내가 제어하는 훈련‘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또 다른 한편, 생각과 인지는 ‘의식’의 범위 안에서 벌어진다. 우리가 수면 마취제를 맞고 깊이 잠들어 있을 때 분명 뇌는 활동을 하지만 우리는 깨어난 후 그 활동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잠든 시간 동안 분명 온몸의 각족 감각세포들이 신경을 통해 뇌에 신호를 전달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흔히 말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나 ‘무의식적인 생각’은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 몸이나 뇌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을 의식적으로 다시 알아차린 것이다. 만약 계속 무의식 상태였다면 우리는 그 행동이나 생각을 애초에 인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자면 의식이라는 건 ‘나’ 또는 ‘나의 정신‘의 전원 스위치가 켜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금 어려운 얘기였지만, 여기서 내가 발견한 흥미로운 포인트가 이어진다. 그것은 ‘인지’에서 ‘생각’을 배제해 보는 것이다. 생각을 배제한다면 일단 나의 잡생각을 알아차리는 과정은 생략된다. 그렇다면 인지의 대상은 감각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소리를 알아차리는 데 그 소리에 대한 언어적인 생각을 되도록 배제하고 알아차림 자체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에 힌트를 준 것은 내가 좋아하는 요가 스튜디오의 선생님의 한마디였는데 그것은 ’ 소리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였다. 그냥 소리 그 자체에 빠져드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생각들은 계속 알아차리면서 더 진행되지 않도록 한다. 그러면 소리 자체를 순수하게 인지하는 시간을 조금 더 벌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이 가장 흥미로워지는 것은 그 인지의 대상을 ‘내 몸의 고유 감각’으로 할 때였다. 나의 경우 가장 먼저 시도했던 것은 내 팔에서 느껴지는 고유감각이었다. 팔을 잃은 분이 아니라면 우리는 팔이라는 신체 일부에서 전달하는 다양한 감각을 항상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뻐근함 일 수도, 간지러움 일 수도 있고, 현재의 자세나 움직임에 대한 감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을 배제하면 재밌는 일이 생긴다. 우리가 평생 느껴온 그 느낌에 ‘팔’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지면서 그 감각만이 남는 것이다. 그것은 평생 당연한 것으로 느꼈던 감각을 일순간 낯설어지게 만든다. 그러면 한없이 친숙했던 내 팔의 감각이 너무도 신비로운 채로 남는다.


알아차림 명상을 하다가 이 흥미로운 발견을 하고서 나는 온몸 구석구석의 감각, 시각, 청각, 후각 등등 모든 것에 대해 생각을 배제하고 알아차려보려 했다. 그러다 보니 더욱 흥미로운 상태가 뒤따랐는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생각을 배제하면 내가 지금 거실 바닥에 앉아있다는 것을 생각으로써 전제하지 않게 되고 그저 바닥의 서늘하고 단단한 감각만이 남는다. 집안의 공기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약간 선선한 감각만이 남는다.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온몸 곳곳의 감각들이 나를 알아차려달라며 아우성친다. 아주 짧은 찰나의 이 순간을 경험하고 바로 뒤따른 나의 ‘생각’은 ‘마치 내가 지금 막 생명을 얻어 태어난 것 같다’는 감상이었다.


명상을 할 때 이 단계에 이르기는 쉽지 않았다. 우리는 감각에 이름을 붙여 생각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하다. 특히 세탁기에서 안내음이 나오거나 밖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거나 할 때는 생각을 배제하고 감각만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아주 가끔씩 운 좋으면 도달할 수 있는 이 단계는 한 동안 내가 명상을 하면서 가장 즐거워하는 보상 중 하나였다. 아주 운이 좋아서 이 상태를 조금 길게 유지할 수 있게 되면 우주에 나의 감각만이 남는 것 같이 온통 나의 감각으로 둘러싸인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앞서 정리한 개념들을 바탕으로 하면, 나의 주의를 감각으로만 집중하면서 나의 ‘의식’ 자체를 알아차리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었다. 나라는 존재의 중심점에 나의 의식이 있고, 그 주변에 수많은 감각들이 있는 이 일련의 사건을 알아차리는 경험은 늘 일 생각으로 가득했던 내 머리를 완전히 리셋하는 데에 정말 크나큰 도움이 됐었다.




여기까지 적어둔 내 나름의 명상 팁은 나에게 번아웃 우울증이 찾아오기 1년쯤 전에 발견한 것이었다. 당시 나는 스스로 꽤 괜찮은 수준의 명상을 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콘셉트 자체가 꽤 멋지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명상의 저 상태까지 도달하고 나면 마음이 정말 차분해졌었다. 겉보기에도 있어 보이고 실제 효능도 있었으니 스스로 후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러한 상태의 명상도 나의 마음 어딘가에 쌓여가는 묵직한 어두움을 막지는 못했던 셈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이 점이 잘 이해가 안 됐다. 이런 나름의 명상 방법으로 꽤 좋은 효과를 보고 있었는데 왜 번아웃을 피하지 못했을까.


번아웃이 찾아오고 나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글을 통해 차차 밝히겠지만 오늘 이야기할 그 노력 중 하나는 - 막상 문장으로 쓰려니 좀 모순적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 유튜브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때마침 유튜브에는 마음 챙김이나 mental wellness에 대한 수많은 정보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고 그중 나의 알고리즘에서 가장 눈에 띈 2명의 전문가가 있으니, 바로 김주환 교수와 앤드류 후버만 교수였다. 둘의 공통점은 뇌과학 및 신경의학의 관점에서 마음과 감정을 다룬다는 것이다. 두 학자 모두 유튜브 등 뉴미디어를 통해 활발한 활동을 현재 진행 중에 있다. 각 학자와 이론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남기기로 하고, 이 두 학자의 이론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감정이나 정서 같은 ‘마음’의 문제가 사실 철저히 ‘몸‘의 문제라는 점이었다.


김주환 교수가 많은 강연들과 최근 집필한 저서 ‘내면소통’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최근 뇌과학 이론의 중요 내용 중 하나를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가 ‘감정’이라 부르는 현상은 궁극적으로 뇌의 편도체가 활성화되어 만들어진 신체 감각을 대뇌피질이 다시 인지하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감정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이다. 우리가 얘기하는 기쁨, 행복 같은 감정은 사실 감정이 아니라 대뇌피질의 해석이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같은 정서장애는 대체로 이 편도체 활성화에서 비롯된 신체감각을 대뇌에서 인지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는 상태이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편도체는  대뇌변연계의 부위로, 인간이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없다. 심장박동이나 조건반사처럼 무의식 차원에서 작동하는 뇌 부위인 것이다.


앤드류 후버만 또한 다양한 내용의 방송, 강연, 인터뷰를 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내용 상의 특징은, 신체적 활동을 통해 마음이나 정서적 문제를 제어하는 방법들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특정한 호흡 방식으로 신경체계를 자극하거나, 무언가를 섭취하는 행위를 통해 정서적 반응에 영향을 끼치거나, 얼음목욕 등의 행위를 통해 무기력 등의 정서적 상태를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김주환 교수가 설명한 편도체의 작용과 대뇌피질의 기능이 동일하게 언급된다.


이 이론들을 소개하면서 이 두 학자는 최근 연구 논문들의 자세한 내용을 함께 설명함으로써 이 내용들이 하나의 가설이나 도전적인 주장이라기보다는, 최근 과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들이라고 밝힌다. 즉, 이 내용들은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인 셈이다. 다른 비전문가들의 ‘카더라’식 유튜브 쇼츠나 블로그 글처럼 그냥 그럴싸해 보이는 좋은 말이 아니라 내용 하나하나에 그 근거가 되는 논문들의 출처가 명기되어 있는 이 정보들은, 나름대로 마음 챙김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를 주었다.


앞서 소개한 내 알아차림 명상 방식은 다분히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활동이었다. 인지, 생각, 의식 모두 말이다. 서로 전혀 다른 3개의 활동에 대해 나름대로 새로운 접근을 했고, 그렇게 그 3가지 활동의 비중이나 순서를 바꿔본 것이다. 물론 그 자체도 꽤나 어려운 일이었고, 그 효과가 없었거나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그 일들은 내 머릿속에서만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이다. 그 가운데 나는 그 머릿속이 그 밖의 것들, 그러니까 몸 전체와 어떤 작용을 주고받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감각에 집중하여 감각만을 인지하려는 노력은 분명 몸에서 시작된 신경신호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인지하는 것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몸에서 일어나는 일 그 자체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김주환, 앤드류 후버만 두 학자의 이야기는 일관되게도 이 모든 것이 몸의 문제임을 시사한다. 결과적으로 나는 너무나도 중요한 한 영역을 통째로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것은 마치 물은 주지 않고 일조량의 조절만으로 꽃을 키우겠다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나는 30대 시절 일화가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극심한 운동부족인 육체를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헬스장 등록도 몇 번 해봤지만 늘 작심삼일이었고 당연히 효과도 없었다. 그러던 중 한 블로그를 알게 됐다. 그 블로그에선, 지금에야 운동의 기본 중 기본이지만 당시에는 꽤 도발적으로, 코어 강화의 중요성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었다. 고중량 스쿼트나 데드리프트, 케틀벨, 컨디셔닝 운동과 고강도 인터벌 등 트렌드를 10년 이상 앞서간 블로그였던 셈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블로그 글 중에 ‘러닝머신에서 1시간씩 뛰어봐야 체력이 늘지 않는 이유’, ‘벤치프레스를 아무리 해도 힘이 세지지 않는 이유’ 같은 내용들은 그동안 내가 어떤 부분에서 잘못 접근했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일화의 결말은 우스꽝스럽다. 나는 몇 달간 그 블로그를 매일 읽고, 읽었던 글을 또 읽었지만, 실제로 운동을 하지 않았다. 긴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는 무거운 바벨을 승모근의 어느 부위에 얹어야 하고, 풀스쿼트를 할 때 복압을 어떻게 채워야 허리 부상을 막을 수 있는지 등등을 아주 상세하게 시뮬레이팅 했지만 정작 실제 내 어깨에는 한 번도 바벨의 차가운 금속이 닿았던 적이 없었다. 그 결과는 너무나도 자명했다. 내 육체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부작용은 컸다. 내가 마치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고 그래서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는 듯한 ‘태도’가 그 부작용이었다. 그 태도는 실제 몸을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운동으로부터 나를 더 격리시켰다.


나의 알아차림 명상은 일면 고중량 풀스쿼트의 시뮬레이팅과 같지 않았을까. 내 삶에서의 행동,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주어진 시간을 보내는 방식 자체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하루에 몇십 분씩 머릿속에서 기어를 바꿔 끼워보는 것 만으로는 실제 ‘나’라는 사람 안에서의 드넓은 우주에서 벌어지는 삼라만상에 비해 티끌만큼 작은 발버둥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깨달음은 다소 부끄럽고 허탈하긴 했지만 한편으로 홀가분한 마음을 가져다줬다.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도 수렁에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는 아무것도 안 해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해보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것저것을 해보기로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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