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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마음 챙김의 시간

프롤로그에서 언급했듯, '마음 챙김(Mindfullness)'이라는 개념은 나에게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처음 이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ADHD 진단을 받기보다 조금 더 전인, 4번째 스타트업 창업을 하고서 회사의 성장에 몰두한 시기였다. 경험해 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누가 시킨 일 보다 스스로 만들어낸 일이 더 무서운 점을. 누가 시킨 일은 끝이 있다. 하지만 스스로 만들어낸 일은 끝이 없다. 나 자신을 얼마든지 혹사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나는 스스로 만들어낸 일들에 파묻혀있었다. 밤늦게 퇴근해서 침대에 누워도 머릿속은 일 생각으로 가득해서, 마치 비워지지 않은 채 차여만 가는 압축수납함 같았다. 


이 시기에 우연히 명상과 관련된 영상을 보게 됐다. 이 영상의 주요 메시지는 '잡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차리기만 해도 충분하다'였다. 그전에도 간혹 명상과 관련된 글이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고 스스로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그저 가부좌 자세로 차분하게 생각하는 행위 정도로 여겼었다. 보통 사람들도 어느 정도 그렇겠지만 ADHD인인 나는 차분하게 생각을 하다 보면 순식간에 수없이 뻗어나가는 잡생각들의 가지 사이를 오가게 됐었다. 그래서 명상은 나에게 그저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잡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니. 귀가 솔깃해지는 얘기였다. 


거창한 목표의식을 갖지 않고 그저 호흡에 집중하려 노력하면서 은근슬쩍 잡생각이 시작될 때, '잡생각이 시작됐구나'라고 알아차리기만 하는 정도는 ADHD인으로서도 할만했다. 그렇게 자기 전에 명상하는 시간을 5분, 10분씩 갖다 보니 호흡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감각, 소리, 감은 눈에 맺히는 알록달록함 등 다른 감각에도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온전히 집중한 채로 10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쉴 새 없이 잡생각으로 빠져들면서도, 되도록 빠르게 그 잡생각을 알아차리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게만 해도 잡생각의 가지가 더 뻗어나가기 전에 가지치기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5분, 10분만 시간을 보내도 압축수납함 같던 머릿속의 압력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서투른 명상이 어느 정도 내 삶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즈음, 나는 4번째 창업한 회사를 떠나고 ADHD 진단을 받았다. 처방받은 약의 효과는 알아차림 명상과 일면 맞닿은 맥락이 있었다. ADHD인은 일상적인 주의력이 매우 낮다. 엄밀하게 표현한다면 어떤 한 가지에 주의를 쏟았다가 그 주의를 다른 것으로 돌리는 속도가 빠르다고 할 수 있겠다. 주의가 유지되는 시간이 짧은 셈이다. 여기서 그 '짧다'는 게 몇 분 단위가 아니라 몇 초 단위라고 생각해 보자. 이렇게 빠르게 주의의 대상이 바뀌는 것은, 머릿속에 그러한 난장판을 품고 있는 본인 입장에서는, 마치 여러 것들이 동시에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떼를 쓰는 느낌에 가깝다. ADHD 처방약을 먹으면 그런 난장판이 조금 조용해지면서 어느 하나에 주의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수많은 잡생각의 아우성이 조금 줄어든다는 점에서, 잡생각의 가지를 빠르게 쳐내는 알아차림 명상과 일맥상통한다. 


ADHD 처방약과 알아차림 명상. 이 둘이 새로이 함께 하게 된 일상은 그 전과는 조금 달랐다. 어디까지가 명상의 영향이고 어디까지가 약효인지를 확실하게 구분하긴 어려웠지만, 전반적으로 머릿속이 차분했고 평소의 삶 속에서 느끼는 감정을 조금 더 또렷하게 느끼면서도 그 감정에 휘말리는 경향이 줄어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대화 속에서 종종 '예전 같으면 지금 이 시점에 내가 상대의 말을 끊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곤 했다. 이러한 알아차림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는 여유로 이어졌다. 그 결과 나도 상대도 좀 더 만족스러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체감하는 변화는 확실히 있었다. 처방약이든 알아차림 명상이든, 둘 중 하나만으로는 이러한 변화를 만들 수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둘의 조합으로, 알아차림이 내 일상 속에서  조금씩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일상에서의 알아차림은 소위 '메타인지'라고 불리는 자기 객관화에도 좋은 영향을 끼쳤다. 어떤 행동에 대한 충동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 행동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었고, 순간순간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 감정의 여파를 조절하는 효과가 있었다면, 이 것들이 쌓여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차리는 것으로 자연스레 이어진 것이다. 충동에 따라 행동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1인칭 시점에 비유하자면, 이것들을 알아차리는 과정이 3인칭 시점에서 '나'를 바라보는 훈련의 효과를 만들면서, 나 자신을 객관화하는 힘을 길러주고 있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나 스스로가 느끼는 변화일 뿐, 내 주변인들이 이 시기의 내가 그만큼 변화했다고 생각할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남들이 인지를 하든 못하든 내가 느끼기에 그 변화가 반가웠다는 점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 연재물을 처음부터 읽은 분이라면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셨으리라 예상해 본다. 혹시 이 글로 이 연재물을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여기서 잠시 멈추고 '프롤로그'나 1편 '서툰 인정의 시작'을 먼저 읽어봐 주시길 부탁드린다. 읽고 다시 이 글로 돌아온다면, 마찬가지로 약간 의아하시리라 예상한다. 사실 예상한다기보다는 같이 의아하게 여겨주시길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아주 의아했기 때문이다. 


2년 전 ADHD 진단과 알아차림 명상으로 조금씩 변화한 내 일상은, 꽤나 건강한 방향을 향하고 있지 않았나? 서툴더라도 꾸준히 쌓아온 명상의 시간과 이로 인해 일상 속으로 퍼진 알아차림의 힘은 분명 꽤 괜찮았다. ADHD 처방약은 삶의 사적인 영역에서의 불편함을 해소했을 뿐 아니라 업무 수행 능력에도 적잖이 긍정적인 효과를 보였다. '불혹(不惑)'이라는 40대를 맞으며 기대했던 인격적 성장이 이런 것일까 싶은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번아웃 우울증인가. 이렇게 알아차림을 통해 마음 챙김을 나름대로 실천해 온 나에게 왜 공황 증상이며 불안장애며 하는 것들이 갑작스레 찾아온단 말인가. 


돈이 없어 직원들의 급여일을 지키지 못한 책임감에 고통을 느끼던 시기가 4번의 스타트업 창업마다 한 번씩은 있었고, 사기를 당해 보기도 하고, 믿었던 사람의 호언장담이 물거품처럼 날아간 일도 겪어보고, 훨씬 더 높은 강도의 가혹한 업무 상황도 겪어보고, 그리고 그때는 모두 알아차림이니 마음 챙김이니 ADHD 처방약이니 하는 것도  없이 오롯이 그저 버텨내기만 했었는데도 괜찮았는데, 왜 지금 이렇게 무너지는 것인가. 감정적으로 억울하다는 것 보다도, 이성적으로 납득을 하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감정적으로 너무너무 억울하기도 했다. 


물론, 큰 병치레 없이 운동을 하지 않던 사람이 몇 년간 꾸준한 운동을 통해 몸을 단련했다고 해서 큰 병에 걸리지 말라는 법은 없다. 병에 걸린 것은 그 사람 잘못이 아니다. 잘잘못과 상관없이, 그 병은 그 사람을 찾아온 것이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실이 무효화되진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사람은 억울할 것이다. 의아할 것이다. 납득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싶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내가 번아웃 우울증을 이겨내는 과정은 건강을 찾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이 억울함과 의아함을 해소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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