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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몸이었다는 체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경험들을 다시 발견하다

(오늘의 글은 ADHD 처방약의 약효가 떨어진 상태에서, ADHD 적인 사고의 흐름을 굳이 제어하지 않고 그냥 쓰다 보니, 만연체라든가 주제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등의 문제를 따로 교정하지 않았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리면서도, 그런 부분을 눈치채 주시는 것도 읽는 재미를 더해주리라 기대합니다.)


알아차림과 마음 챙김에 대한 그간의 성취가 사실은 머릿속이라는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작지 않은 충격을 줬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 해볼만큼 해봤지만 잘 안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해볼 만한 게 무궁무진하게 많이 남아있다는 얘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까 하는 막막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막막함을 아주 조금만 뒤집어보면 눈앞 가득 펼쳐진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의 어디부터 발자국을 남겨볼까 할 때 느껴지는 설렘이기도 했다.


이 즈음에 우연찮게 영감을 주는 경험을 하게 됐다. 우선 부연설명을 좀 해보자. 우울증이 한창 심할 당시에 살던 집에서 이사를 했다. 동네를 옮긴 것은 아니고 원래 살던 집에서 2~300미터 정도 떨어진 정도였다. 운 좋게도 회사와 집이 가까웠고, 아이 어린이집도 같은 동네여서 아침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나는 바로 출근을 하는 것이 일상적 루틴이었다. 그러다 이사를 하면서, 그 2~300미터의 차이가 아이 어린이집에서 멀어지는 방향이었던 것이다. 그 정도 거리야 성인에게는 몇 분 더 걸으면 되는 정도였지만 7살 아이에게는 조금 부담이 되는 거리였다. 그래서 아이를 뒤에 태울 수 있는 자전거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중고장터에는 생각보다 아이를 태울 수 있는 자전거가 흔하지 않았고, 적은 수의 매물도 가격대가 부담되는 수준이었다. 저렴한 중고 자전거를 사서 튼튼한 뒷좌석을 만들어주는 게 더 경제적이면서 안전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그래서 일단 만만한 가격대의 자전거를 사고, 최대한 튼튼해 보이는 뒷좌석 안장을 따로 주문했다. 그 안장을 달 수 있는 공구도 마땅치 않아서 저렴한 공구세트까지 주문해야 했다. 주문한 모든 제품이 도착한 그날, 이 모든 걸 잘 조립하면 내일 아침부터 아이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등원과 출근을 하는 새로운 일상을 시작할 수 있다는 설렘이 오랜만에 도파민을 뿜어내어주던 그날이, 바로 우연찮게 영감을 주는 경험을 했던 그날이다.


이 이야기의 전개는 이렇다. 저녁 8시쯤 모든 물품들의 배송이 완료됐고, 아이는 저녁 9시 반쯤 잠들었다. 나는 10시쯤 거실로 나와 자전거와 공구와 짐받이와 뒷좌석 안장 등등을 방바닥에 풀어두었다. 드라이버, 스패너, 육각렌치 등등을 바꿔 들어가며 조립을 시작했다. 멋보다는 튼튼함을 위주로 주문한 뒷좌석 안장은 아무래도 지지대가 많은 구조이다 보니 꽤 많은 부품들로 구성돼 있었다. 부품이 많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한 20여분 지나고 대략적으로 뒷좌석 안장의 형체가 드러날 때 즈음, 뒤늦게 깨달았다. 맨 처음 조립했던 지지대를 좌우 반대로 조립했다는 사실을. ADHD인으로서 이런 경험은 한두 번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거의 일상화 돼있기 때문에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니었고, 자책감을 느낄 일도 아니었다. ADHD인에게 어떤 물건을 처음 안겨주었을 때 매뉴얼을 먼저 정독하기를 기대한다면 당신에게 돌아올 것은 실망뿐이다. 게다가 ADHD인은 여러 부품으로 이뤄진 장비를 조립할 때, 한 부품을 조립하면서 다음 부품을 생각하거나 완성된 이후의 모습을 생각하거나 그 완성품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생각하거나 아예 다른, 예를 들면 점심에 먹었던 제육볶음에 생강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 같은 걸 생각하지, 지금 조립하는 부품에 주의를 유지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랬기 때문에, 하필이면 잘못 조립한 부품이 맨 처음 조립한 부품이었고, 그 뒤에 조립한 모든 부품들이 그 첫 부품에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20여분 동안 조립한 모든 부품을 다시 해체해야 했다.


그렇게 조립과 해체와 재조립을 완료하고 튼튼한 뒷좌석 안장이 충분히 안정적으로 마무리된 자태를 드러냈을 때, 시간은 밤 11시를 훌쩍 넘겼다. 30분이면 족히 끝냈을 일을 1시간 반 넘게 걸려 끝내고 말았다. 여느 때 같으면 약간의 짜증과 ADHD인으로서의 서러움 같은 감정들이 솟아올랐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1년에 한 번 손에 쥘까 말까 한 스패너와 렌치로 인해 손에서 약간의 쇳내가 나고, 손가락 마디마디 및 옷자락에 시커먼 기름때가 묻어있는 가운데, 내가 그렇게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돼있었고, 무엇보다도 머리가 너무나 맑고 평온했다.


그러고 보니 자전거 부품을 조립한다는 건 생각보다 몸을 많이 쓰는 일이었다. 만만한 가격대의 자전거였으니 프레임의 재료가 티타늄이나 탄소섬유처럼 특별히 가벼운 소재였을 리도 없고, 아이를 뒤에 태워야 했으니 크기도 꽤나 큼직했다. 그 몸체를 뒤집었다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하면서 꽤 많은 완력을 써야 했던 것이다. 볼트와 너트를 조일 때에도 아이가 타야 한다는 생각에 되도록 있는 힘을 다 해 조여야 했고, 그런 만큼 다시 풀 때에도 물리 법칙에 따라 내가 조일 때 줬던 힘과 거의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큰 힘을 줘야만 최대정지마찰력을 초과할 수 있었으므로, 말하자면 3배의 힘을 들여야 했던 것도, 그  ADHD의 실질적 영향력이 얼만큼이었는지를 따지는 것과는 별개로, 사실이었다.


그 결과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떤 하나의 일에 오랜 시간 집중을 했다. 이 것이 내 머리를 너무나 맑고 평온하게 만들어줬다. 문득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마음은 몸이었다는 생각에 꽤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 경험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이런 경험은 이 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약 4~5년 전쯤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때, 그 코로나19의 여파로 '캠핑'이 많은 이들의 삶에 돌파구 역할을 해주던 그때의 일이다. 우연찮게 지인이 강원도 고성의 한 해변에서 캠핑을 한다길래 근처 펜션을 예약하고 가족들과 함께 간 적이 있었다. 나는 평소 귀찮은 걸 정말 싫어하고, 몸을 쓰는 일은 무엇이든 잘 못했으며, 멀리 숲 속이나 바닷가보다는 도심을 좋아해서 굳이 군대도 의경에 지원했을 정도였기 때문에, 나를 오래 알아온 그 누구라도 내가 캠핑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그날도 별생각 없이 따라갔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어차피 코로나19 때문에 주말에 별다른 활동도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그날 함께했던 지인들의 다음 캠핑 일정에 맞춰 기본적인 캠핑장비를 사서 한번 더 참여하기로 했었다.


1달쯤 시간이 지나고 대망의 첫 캠핑을 하게 된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퇴근하자마자 새것 냄새가 풍기는 캠핑 장비들을 차에 싣고 강원도 고성으로 향했다. 금요일 밤이다 보니 당연히 길은 막혔고, 고성군에 들어섰을 때 이미 시간은 새벽 1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첫 캠핑의 설렘이 가득했으므로 시간이 늦고 몸이 피곤한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차창을 뚫을 기세로 쏟아지는 엄청난 폭우였다.


그 폭우 속에서, 드디어 해변에 도착했다. 아내는 잠이 든 아이와 함께 차에서 기다리고, 나는 별 수 없이 폭우를 맞으며 텐트를 쳤다. 이미 도착한 지인들과 함께, 구매 후 첫 피칭이다 보니 어느 폴대가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좌충우돌하며 텐트를 쳤다. 에어매트를 꺼내서 펌프를 열심히 밟아 공기를 채우고, 조명이니, 침낭이니 잡동사니들을 꺼내어 축축한 잠자리를 마련했다. 아이를 조심히 안아 최대한 비를 맞지 않게 텐트 안에 눕히고, 나는 다시 나와 지인들과 가볍게 맥주 한 캔을 하고, 이미 새벽 2시가 넘었으니 몸의 물기를 대충 닦고 서둘러 텐트로 들어가 누웠다. 내가 맞은 비 때문인지 이미 젖은 침낭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는 습기 속에서, 차창도 뚫을 기세였는데 텐트 따위야 진짜로 뚫어버리겠다는 폭우소리에 더해, 동해바다의 파도소리는 분명 몇백 미터 멀리에서 발생하고 있을 것임에도 마치 내가 파도 위에 텐트를 친 것 같은 데시벨로 텐트 안을 가득 매웠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서 아이를 멀리 눕히다 보니, 자연스레 나는 바람이 부는 방향에 누웠고, 결과적으로 거의 텐트 벽을 내 뺨에 댄 체 자야 하는 상황이었다. 5시간 넘게 폭우 속에서 심야 운전을 했고, 그 폭우 속에서 텐트를 쳤고, 맥주 한 캔을 마신 나는,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잠이 들어야 했다. 아, 캠핑 힘든 거네,라는 생각을 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더니 아침이었다.


조금 더 부연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예민함을 달고 살아서 평생 꿈을 안 꾸고 잔 적은 수면내시경을 할 때 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꿈을 총천연색 올컬러로 꾸는, 그러니까 수면의 질 측면에서의 최악의 조건을 갖고 살아왔다. 시험기간에 밤을 새우고 다음날 쓰러지듯 잠이 들더라도, 가족들이 치킨을 시켜 먹으면 배달원이 누르는 초인종 소리와 치킨의 냄새를 감지하고 그게 교촌오리지널콤보인지 처갓집양념치킨인지를 기억하는 류의 인간이다. 그런 내가, 눈을 감았다 떴더니 아침이 되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것도 이런 최악의 수면환경 속에서 말이다.


동해바다는, 당연한 얘기지만, 동쪽에 있다 보니 일출의 햇빛을 막아주는 지형지물이 일절 없었고, 그 덕분에 나는 아침 7시도 되기 전에 눈부신 햇빛 때문에 잠에서 깬 것이었고, 그렇다면 내 수면시간은 5시간 남짓이었을 것이다. 고3 때도 8~9시간은 자야 했던 나에게 5시간은 가혹한 것이었음에도, 나는 너무나도 상쾌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생 몇 번 겪어보지 않은, 꿈을 꾸지 않은 숙면이어서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텐트 밖으로 나왔고, 동해 특유의 짙푸른 바다와 찬란한 태양빛과 적당히 짭짤한 바람이 마치 축하의 팡파르라도 연주해 주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캠핑이 시작됐다. 4~5년간의 캠핑 가운데 내가 캠핑에서 가장 즐기는 것은 아내와 함께 하는 불멍 시간이지만, 그다음으로 즐기는 것은 텐트를 치는 행위와 그 모든 장비를 철수하는 행위이다. 이 부분에서도 내 오랜 지인들의 대다수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손가락 까딱하는 게 귀찮아서 단축키를 외우는 인간이 짐을 내리고 폴대를 끼우고 팩을 박는 걸 즐기는 것에 모자라, 그걸 하나하나 철수하는걸 '즐긴다'는 건 내가 봐도 의아한 일이다. 결국 나는 내 이전 주변인들과 나 자신의 선입견을 무릅쓰고 내 요즘 주변인들 사이에서 캠핑의 상징 같은 인물이 돼버렸다.



몸을 쓰는 것과 가장 거리가 먼 인간이었던 내가, 캠핑을 즐기고 그중에서도 몸을 쓰는 과정을 즐긴다는 것. 우울증이 한창 심하던 시기에 1시간 넘게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 부품을 조립하던 가운데 평온함을 느낀 경험. 꽤 긴 시간차를 지닌 이 일들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 방향의 끝에는 '마음은 몸이었다'는 말이 놓여있었다.


매일 같이 공황증상과 우울증의 무기력함 속에서 갈피를 못 잡던 그때, 나에게는 몸을 쓸 일이 필요했다. 하지만 캠핑을 매일 갈 수도 없고, 자전거를 매일 풀었다 조였다 할 수도 없었다. 나에게 무언가 필요했다. 내가 시도해 본 여러 가지 활동 중에 지금으로서 가장 상징적이 된 활동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뜨개질이었다.


다음 편에는 뜨개질에 대해 얘기해 보자.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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