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아이덴티티는 명찰에서, 마케터 아이덴티티 어디에서?
병원에서 PRN 간호사로 출근하라는 전화를 받고, 막 병원을 나가기 시작했던 어느 날이었다. PRN 간호사란 정식 부서 배치 전 여러 병동을 돌며 acting 위주의 간호 혹은 그 외 잡다한 간호업무를 하는, 한마디로 땜빵 간호사다. 나는 내과 병동 PRN 간호사로 한 달 반 동안의 업무 배치를 받았다.
중환자가 많은 내과 병동이었기 때문에, 땜빵 간호사는 항상 정신없이 불려 다녔다. 그날도 병동을 한 바퀴 돌며 환자 혈압, 체온 등을 재고 막 뒤돌아서는데, 선배 간호사가 나를 급하게 찾았다. 허겁지겁 달려가니 선배는 앞 뒤 맥락도 없이 다짜고짜 IV(정맥주사) 하는 순서를 말해보라 주문한다. 나는 바짝 긴장해서 교과서에 있는 정석 매뉴얼을 더듬대며 읊었다.(먼저 손 위생을 하고 오더를 확인한 후…) 완벽하진 않지만 크게 빼먹은 것은 없었던지, 선배는 이 정도면 됐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임무를 내렸다.
"OO호의 OOO환자 라인 잡고 와."
간호사라면 신규 시절 정맥주사와 관련된 절절한 추억 하나쯤은 모두 다 갖고 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정맥주사 초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그야말로 초짜 중에 쌩 초짜였다. 학생 때는 서로 연습이라도 했었지, 국시 본 이후로는 니들을 잡아 본 적도 없어 주사 놓는 것이 어떤 느낌이었는지가 까마득했다. 하지만 신규 간호사가 하늘 같은 선배님께 토를 달 수는 없는 법. 나는 물건들을 잘 챙겼는지 몇 번이나 확인한 후 환자의 병실로 찾아갔다. 병실을 향하는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환자가 신규 간호사한테는 주사 안 맞는다고 거부하면 어쩌지, IV 실패해서 환자가 엄청 아파하면 어쩌지, 한 번에 주사 못 놨다고 보호자한테 맞는 거 아냐? 등등. 하지만 그런 고민을 길게 하기엔 병동은 너무 바빴고 할 일은 많았으므로, 나는 용기 있게 병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짐짓 능청스럽게(내가 초보라는 것을 환자가 알면 나도, 환자도 좋을 것이 없다.) 토니켓을 묶고, 환자 정맥을 확인했다. 약간 떨리는 손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다행히 니들은 한 번에 환자 혈관에 안착했다.
첫 번째 정맥주사를 성공하자, 그 뒤로 나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IV를 하게 되었다. 물론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감이 없었기 때문에 멀쩡히 좋은 혈관을 터트려 환자에게 머리를 조아릴 때도 있었고, 두 번, 세 번 시도하다 결국 다른 선생님께 부탁드려야 할 때도 있었다. 환자 한 명, 한 명이 도전이었던 병동 생활 초반에는 IV가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IV 성공률도 상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덕분에 약간의 여유도 생겼다. 여유가 생겨서 그랬을까. 어느날 갑자기, 나는 내가 정맥주사를 놓는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나라는 사람 자체는 학생 때와 변한 것이 없었다. 가슴팍에 달려있는 "간호사" 명찰 빼고. 학생 신분으로 병원 실습을 나왔을 때, 나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다. 간호사 선생님의 뒤를 쫓아다니되, 최대한 걸리적거리지 않게 벽과 물아일체 하는 것이 자고로 병원 실습의 미덕이었다. 학생 신분으로는 당연히 환자에게 주사를 놓는 등의 처치를 하는 것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때문에 IV실습은 보통 동기들끼리 서로 혈관을 빌려주거나, 가련한 가족에게 연습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중학생이었던 남동생의 혈관에 실습을 한 번 해 보고 싶었는데, 동생이 너무나 격렬히 저항해 배스킨라빈스 파인트 한 통을 사 주고 간신히 한 번 실습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혈관 주사를 놓는 연습하는 기회 자체가 아주 드물고,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몇 달만에 상황은 아주 달라져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파인트 한 통을 바쳐야 실습 할 혈관을 구할 수 있었던 나에게, 사람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팔뚝을 턱턱 내주고 있었다. 명찰 하나 달았다고, 유니폼 좀 입었다고 나에게 아무 의심 없이 자신의 혈관을 맡기다니. 나는 내 왼쪽 가슴께에서 달랑거리는 간호사 명찰의 위력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나는 간호사를 때려치우고 IT회사의 마케팅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3개월의 인턴 생활이 끝나갈 무렵, 과장님과 정규직 전환 관련 면담을 했다. 그 면담에서, 과장님은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앞으로 모니씨가 마케터로서 회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 고민해봤으면 좋겠어요."
'마케터로서.'
이 말을 과장님께 듣는 순간 그 무게감에 잠깐 휘청, 했다. 마케팅 팀 소속으로 3개월 동안 일을 하긴 했지만, 감히 내가 '마케터'였다고 생각한 순간은 없었다. 마케팅 실무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나는 그 시간들을 '새로운 경험'이라 여겼지, 마케터가 되는 과정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장님 말씀처럼, 사원이 되는 그 순간부터 나는 주니어 마케터로서 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자각하니 가슴께가 뻐근해졌다. 내가 마케터라는 직업을 감히 입에 올려도 되는 것일까.
간호사는 유니폼을 입고, 명찰을 다는 순간 온 세상이 나를 '간호사'라고 인식한다. 간호학생에서 간호사로서의 변환은 이토록 가시적이고, 획기적이라 심지어 간호사 본인도 따라가기 벅찰 정도다. 하지만 마케터는? 마케터는 명찰도, 유니폼도 없다. 자신의 팔뚝을 순순히 맡길 환자도 없다. 그래서 고민이다. 누가 봐도 마케터로 인정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는 나 스스로를 마케터라고 인정해 줄 수 있나?
병원에 입사하고도 한동안은 내가 간호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간호학생인 것 같았다. 다만 좀 더 적극적인 병원 실습을 하는 느낌이랄까. 나는 간호사 명찰을 달고 환자들의 혈관을 찔러대면서도, 간호사라는 아이덴티티를 갖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두 번째 직업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명찰도, 유니폼도 없기에 시간이 더 걸릴 것 같기도, 간호사와는 달리 내가 선택한 직업이기 때문에 덜 걸릴 것 같기도 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여야 나 스스로 "짜식, 너도 마케터 다 됐구나."하고 인정하게 되려나. 궁금하다.
* 인스타그램 계정 @writer.mo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