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회사에서 이런 일을 합니다 - 1년차 ver.
"대학병원 간호사 때려치고 헬스케어 IT 회사 마케팅 팀에서 일해요."
"와 신기하다. 그럼, 지금 회사에서 무슨 일 하세요?"
어딜가서 내 험난한 커리어 여정을 소개할라치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회사에서 무슨 일 하세요?"이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 이 질문은 사실 복잡다단하고 미묘한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 마케팅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간호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의심스러워서)
- 간호사 배경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뭔가 특별한 마케팅을 할거라 생각해서
- 애초에 마케팅이 뭘 하는지 몰라서, 등등.
어떤 의도로 질문을 하든, 대답하기는 참 어렵다.
회사에서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팀 내 나의 위치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마케팅 팀 소속 사원으로, '마케팅'의 넓은 영역에 들어가는 각종 업무를 하고 있다. 팀장님께서 각종 내/외부 미팅을 하면서 회사 비즈니스의 큰 그림을 그린다면, 나는 그 사이사이를 메꾸는 일을 하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물론 아직은 상사의 도움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으므로 내 업무의 대부분은 지시를 받고 보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더불어, 내가 지금까지 책임을 맡았거나, 손 댔던 업무를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프로모션 기획 집행: 온/오프라인 경품 프로모션, 참가사 초청 네트워킹 행사 기획 및 운영
각종 마케팅 자료 기획 및 작성: 브로셔, 랜딩페이지, 앱스토어 소개 글 등
서비스 사용 매뉴얼 작성
어플리케이션 설치 및 소개 영상 시나리오 작성
전시 부스 준비 및 운영
고객대상 이메일(Direct Message) 작성 및 전송
회사 블로그, 유튜브, 카카오톡 채널 관리
그 외 잡다한 글을 쓰고 회의 들어가기
물론 이 많은 것들을 나 혼자 진행하는 것은 아니고, 항상 상사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상사가 내가 할 일을 전달하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면, 나는 죽이되든 밥이되든 진행한다. 내가 초안을 작성하면 상사에게 보고하고, 수정 의견을 받는다. 사안에 따라 보통 1-2번(때에 따라서는 천지 개벽할 수준의) 수정을 거쳐 하나의 완성안이 나온다. 그 완성안이 기획안이면 대표님께 보고 메일을 쓰고, 랜딩페이지 글이면 다른 팀에 필요한 업무를 정리해 토스하고, 프로모션 운영안이면 세부 준비를 시작하는 식으로 일한다.
"회사에서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 최대한 성의껏 대답해보고자 주절주절 내 일에 대해 적어봤지만 이것도 딱 맞는 답은 아니다. 사실 내가 회사에서 뭐 하냐는 질문에 내가 제일 많이 하는 대답은 이렇다.
"마케팅 관련한 거 이것저것 하는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꼬박꼬박 회사에 출근해 일을 (열심히)하면서도 왜 이렇게 회사에서 뭐 하냐는 질문이 어려울까. 여기에 대한 나름의 고찰을 해 봤다.
먼저, 내가 하는 일은 유동적이다. 굵직한 프로젝트를 맡고있지 않으니, 루틴이라고 할 만한 일이 없다. 새로운 서비스가 론칭되면 론칭 준비를 하고, 경품 프로모션이 필요하면 프로모션 기획을 하는 식이다. 지금은 이 업무를 하고 있지만 회사의 방향이나 이슈에 따라서 업무의 흐름이 충분히 바뀔 수 있다.
업무의 유동성은 내가 아직 완전히 업무상 독립을 하지 못한 것과도 관련되어있다. 어떤 부분을 떼어서 독립적으로 일한다면 '나는 이런 일을 한다.'고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상사와 내가 긴밀하게 협업을 해야하는 구조라 실무는 내가 하더라도, 이 일이 온전히 내 책임 하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지막으로, 마케팅이란 것 자체가 애초에 모호하다. 한 문장으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마케팅'을 하려니 '마케팅을 하는 나의 업무'도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사실, 내가 '마케팅팀에서 이런 일을 합니다.'라는 식의 글을 써도 되는 걸까, 오랫동안 주저했다. 업무에 관련된 글을 쓰려면 적어도 일 년은 일해야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내가 신규 간호사 시절에 쓴 일기가 생각났다. 어디에라도 풀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썼던 어둠 가득한 일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정말 아끼는 글 중 하나다. 내가 특히 그 때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글에 초심이 있고, 신선한 시각이 있고, 생생한 분노가 있기 때문이다. 그 때의 내가 나는 신규라는 이유로 업무나 병원에 대한 불만을 집어삼키고, 생략했다면 내 일기는 죽은 글이 되었을 것이다. 처한 시기마다 가지는 시각이 있고, 그래서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그래서 결심했다. 업무 새내기 1년차인 지금, 하루라도 빨리 "회사에서 무슨 일 하세요?"에 대한 답을 적어보자고.
개인적인 소망으로는 이 글을 시리즈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매년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꾸준히 적다보면 연차 별로 업무의 범위는 얼마나 넓어지는지, 일에 대한 관점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추적하는 재미가 솔찬하지않을까.
* 인스타그램 계정 @writer.mo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