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대 동기들을 만나니 뒤숭숭한 마음이 남았다.
병원을 때려친 간호대 동기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의 근황을 들어보니, 다들 자기 앞가림을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퇴사 이후 먹고사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른 동기들의 근황도 공유했다. 졸업 후 몇 년이 지나고 나니 함께 병원에 남아있는 동기들은 거의 없다.
A는 병원 그만두고 연구 간호사를 하다가 작년 말, 국내 유명 제약사에 취직했다.
B는 병원 그만두고 며칠 전 보건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했다.
C는 심평원에 합격해 병원에서 환승 이직을 했다.
D는 아직 병원에 있는데, 곧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볼 예정이다.
이 날, 우리의 화두는 '커리어'였다. 병원을 나온(그리고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는) 네 명의 경력 간호사들은 조개찜 앞에서 진지하게 다른 진로를 탐구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으나 결국 했던 게 간호라 나오는 이야기도 별다를 게 없었다. 제약사, 임상연구 간호사, 심평원, 공무원, 보건교사... , 우리의 이야기는 이쯤에서 돌고 돌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는 간호가 싫어서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 나름의 고민을 거쳐 지금의 회사에 정착했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내가 선택한 일이다. 그런데 왜 간호사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내 마음은 끝도 없이 뒤숭숭할까. 누가 등 떠밀어서 이러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냐 나는.
이 마음의 근원이 어디지? 스스로에게 집요하게 물었다. 그러자 날것의 감정들이 여기저기 튀어오른다. 이 마음들을 단단히 잡아서 확인하려고 나는 달리는 버스에서 핸드폰 메모 어플을 켰다. 그리고 뒤엉킨 감정들을 하나씩 낱낱이 떼어내 활자로 옮겨 적었다.
태생적으로 마이웨이가 어려운 쫄보
간호사 경력을 가진 사람 치고는 특이한 선택을 해서 그런지,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원래 주관이 강하다고 종종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남들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사는 것이 제일 마음 편한 사람이다. 내가 마이웨이를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간호대 입학과 동시에 뒤도 안 돌아보고 전과했을 거다(...)
때문에 더 이상 간호사로 일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다른 커리어를 시작하기까지 사실은 엄청난 내적 갈등이 있었다. 지금은 어찌어찌 병원도 때려치우고 간호학이 아닌 다른 것으로 먹고살고 있기는 하지만, 친구들을 보니 쫄보 기질이 스멀스멀 살아난다. 지금껏 남들 공부할 때 공부하고, 취직할 때 취직하며 비교적 비슷한 속도로 살아온 나인데, 이제는 남들보다 확실히 늦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내 커리어는 어디로 가고 있나
단호하게 말한다. 마케팅을 하는 데 간호사 면허는 쓸모가 없다.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입사 전에는 '실무를 하면 간호사 면허를 살려 볼 커리어 패스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를 실감한다. 업계를 바꾸고 직무를 바꾸고, 거기에 전혀 다른 업계까지 엮는 커리어 패스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급여, 연봉, 그리고 돈.
간호사 면허는 어느 정도의 급여를 보장해준다. 병원이야 말할 것도 없고, 꼭 병원이 아니더라도 면허는 어쨌든 면허 값을 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간호사 면허가 필요하지 않은 일을 한다. 덕분에 나의 급여는 작고 귀엽다. 아주 많-이 귀엽다. 간호사 면허를 버리고 이직하면서 간호사 시절 연봉의 1/3이 삭감됐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연봉 삭감의 고통은 크다. 연봉은 생각보다 더 많이 중요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구구절절 불안한 이유에 대해 끝도 없이 파고들다, 나에게 다시 물어본다. 그러니까, 다시 돌아갈래? 병원을 나온 지 이제 일 년이니까, 돌아가고 싶다면 아직 늦지 않았어.
병원이 싫어서, 간호사가 싫어서 병원을 나왔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제약사, 연구 간호사, 심평원 등 '일반적인' 간호사의 커리어를 진지하게 고려했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결국 저쪽 세계에서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 불안정하고, 휘청거리고, 싱숭생숭 난리법석이지만 치열하게 고민했던 그 시간들과 그때의 결정을 믿는다. 대세를 거스르고, 커리어 패스도 불확실하고, 연봉이 훨씬 적고 심지어 마음도 불안하지만, 그래도 돌아가지 않겠다.
다음 스텝은 '일잘러'
다시 한번 생각해도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은 내렸다만,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는다. 따져보면 내 불안한 마음은 나의 불안정한 기반에서 왔다. '나는 마케팅과 전혀 관련 없는 간호학 학사야.', '나는 IT에 대해 잘 몰라.', '나는 학부 때 그 흔한 인턴 한 번 해 본 적이 없어.'... 부족함을 따지려면 삼일 밤낮을 이야기해도 아쉽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전공이 어떻고 경험이 어떻고 하는 것은 결국 일을 잘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간호학 학사면 어떤가. 그동안 IT에 별 관심이 없었다면 또 어떤가. 결국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하루 치의 업무다. 과거가 어찌 됐든, 나는 실무를 잘하면 된다. 경영학과 졸업생, IT업계에서 신입 생활을 시작한 사람보다는 당연히 늦겠지. 하지만 결국 내가 목표해야 할 것은 '일을 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게 간단해졌다.
1. '간호사 면허를 써먹었더라면...'하며 미련 갖지 말자. 어차피 의료계로는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
2. 기반이 없어 불안한 마음은 '일잘러'가 되는 것으로 극복하자.
※참고: 간호사 면허를 가지고 일하기를 포기한 이유는 '익숙함에 속아 왜 탈간호했는지 잊지 말자' 에서 구구절절 서술해놓았다.
* 인스타그램 계정 @writer.mo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