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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니 Mar 24. 2019

너가 이렇게 하라면서요.

상사가 시킨 대로 했는데 "왜 이렇게 했냐"는 말이 돌아올 때

"모니씨, 프로세스를 왜 이렇게 설계한 거예요? 이렇게 복잡하면 아무도 참여 안 할 것 같은데?"


"..."


난 신나게 털리는 중이다. 지금 시점에서 떠오르는 말은 하나뿐.


'팀장님이 그렇게 하라면서요!'


하지만 난 사회화된 인간이니까, 이 말은 꾹 눌러 참아본다. 나는 상사가 하라는 대로 했는데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내가 입사한 지 두 달 즈음되었을 때, 오프라인 프로모션 기획안을 쓸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기획안 작성에 앞서, 팀장님과 함께 아이디어 회의를 가졌다. 사실 말이 회의지 팀장님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나는 받아 적었으니 업무 지시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어쨌든 처음 해보는 일에 잔뜩 쫄아붙은 나는 그분의 말씀을 토씨 하나까지 살뜰히 받아 적었더랬다.


열심히 적은 대로 기획안이 잘 쓰였으면 이런 구질구질한 글을 쓸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가련한 신입들에게는 늘 그렇듯, 생각지 못한 곳에서 자꾸만 난관이 닥쳐왔다. 살뜰히 받아 적었던 팀장님 말씀을 하나씩 구현해 나가려고 하니, 뭔가 조금씩 어긋나는 구석이 계속 발견되었던 것이다.


먼저, 우리 행사의 진행 방식을 설명하자면 이랬다.

1. 행사 참여자에게 쿠폰을 제공한다.
 2. 쿠폰 수령인 중 랜덤으로 당첨자를 선정한다.
3. 당첨자에게는 준비한 선물을 준다.


그리고 팀장님은 말씀하셨다. A 서비스를 이용하면 행사 참여자에게 쿠폰 제공부터 선물 발송까지 원스탑으로 다 해 준다고. 그래서 나는 A 서비스를 우리 프로모션에 잘 붙이기만 하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알아보니 팀장님의 말씀과 A 서비스의 내용은 달랐다. A 서비스는 쿠폰 발행을 하지만, 당첨자에게 선물을 발송하는 기능은 전혀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기획안을 구체화시키면 시킬수록 자꾸만 삐꺽거리는 요소들이 나타났다. 그렇다고 감히 팀장님의 아이디어를 의심할 수 없었다. 나는 '다 알고 하신 말씀일 거야.', '내가 리서치 능력이 서툴러서 말씀하신 것을 찾지 못하는 거야.'라고 되뇌며 찰떡같이 상사를 믿었다.


나는 하늘 같은 상사의 말을 토대로 이벤트 기획을 써냈다. 그 사이사이 빈 틈은 내가 억지로 채워 넣었다. 내가 봐도 조금 어설프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느낌 탓이겠지? 나는 며칠간의 고뇌를 담은 첫 행사 기획안을 팀장님께 제출했다. 그리고 그 기획안을 읽어보신 팀장님은 말씀하셨다.



"모니씨, 프로세스를 왜 이렇게 설계한 거예요? 이렇게 복잡하면 아무도 참여 안 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했냐."는 내 첫 직장이었던 병원에서도 숱하게 들었던 말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매우 달랐다.


병원에서의 "왜 이렇게 했냐."

"왜 가르쳐준 대로 안 하고 니 맘대로 했냐."라는 뜻이다.


병원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 수혈, 투약, 수술 준비 등과 같은 의료행위는 물론이고, 체위변경과 같이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일에도 정해진 순서와 방법이 있다. 그리고 모든 프로토콜은 당연히 규정대로 지켜지는 것이 정석이다. 그중 하나라도 생략하거나 대충 해도 괜찮은 것은 없다.


대학 4년 내내 이런 엄격한 프로토콜에 대해 배우고, 첫 직장에서도 끊임없이 정해진 규칙을 지키는 것에 대한 훈련을 받았던 나다. A, B, C라고 전달받으면 전달받은 A, B, C를 수행하는 게 당연했는데, 지금 팀장님은 내게 "왜 내가 말했다고 그대로 했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이 상황이 어리둥절할 수밖에.




그 뒤로도 팀장님은 내게 "왜 이렇게 했냐"라고 자주 물어보셨다.

 

항상 팀장님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나는 그걸 그대로 실행하고, 그 아이디어가 실제로 구현되었을 때 뭔가가 맞지 않으면 꼭 이 말이 나왔다. 솔직히, 처음에는 억울해 미칠뻔했다.(너가 이렇게 하라면서요.)


그때의 나는 A라고 지시했으니, A로 하지 그럼 어떡하라고? 하는, 지극히 병원스러운 마인드로 일을 하고 있던 셈이다. 이 고민은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준 사람 또한 팀장님이었다.



팀장님은 "왜 이렇게 했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꼭 받아내셨다. 


처음에는 상사의 의견을 부정하는 것 같아 다른 의견 자체를 말씀드리기가 어려웠다.(이건 병원에서 생긴 버릇이기도 하다. 병원에서는 절. 대. 변명을 하면 안 된다.) 하지만 자꾸 "왜 이렇게 했냐"라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언제까지나 침묵으로 일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조금씩 팀장님이 제시하신 아이디어의 한계를 말씀드리고, 내가 조사한 더 좋은 대안을 말씀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의견을 들으신 팀장님은 내 결정을 존중해주셨다.


팀장님: 왜 이렇게 했어요?

나: A 서비스는 리뉴얼돼서 말씀해 주신 것이랑 달라졌더라고요.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A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어요.

팀장님: 그럼 A 서비스 말고 다른 업체는 없어요?

나: B 서비스가 있어요. B 서비스는 아직 인지도가 낮지만 이번 행사 성격을 고려하면 이러저러해서 A 서비스보다 손도 덜 가고 적합할 것 같아요.

팀장님: 그럼 모니씨 의견대로 하죠.


오, 이렇게 해도 되는 거였나? 내 의견대로 진행해도 괜찮은 거였어? 내 의견이 수용되는 경험이 쌓이자, 상사를 설득할 확신이 있다면 세부 사항은 내가 직접 결정하고 보고하는 일이 늘어났다. 상사의 "왜 이렇게 했냐."의 빈도수는 줄어들었고, 일처리에 대한 만족도는 상승했다. 그제야 나는 "왜 이렇게 했냐."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상사라고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특히 요즘같이 변화가 빠른 세상에서는 그분이 알고 있는 것이 정답이 아닐 확률이 더더욱 높다. 상사의 "왜 이렇게 했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사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상사의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와."라는 말은 사실

"내가 아이디어 던져줬으니, 알아서 디밸롭해서 세련된 결과로 가지고 와."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나의 "왜 이렇게 했냐" 철학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상사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먼저 파악하자.

상사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하되, 더 좋은 대안을 리서치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자.

더 좋은 안을 찾았다면 상사를 납득시킬 만큼 충분한 설득력을 갖자.

그리고 과정에 집중하기보다, 좋은 결과를 내는데 집중하자.(세부 사항은 결국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한 것!)


그럼, 당신은 더 이상 상사의 "왜 이렇게 했냐."라는 말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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