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대 동기들이 모여 큰 세미나 룸에서 학술 발표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맡은 편에는 서먹한 동기가, 옆에는 내일 미팅이 예정되어 있는 의대 교수님이 앉아있었다.(여기서 '내일 미팅'이라는 것은 현실 세계의 리얼 미팅을 말한다.) 반사적으로 몸에 기합이 들어갔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내 옆에 앉아있던 교수는 큰 소리로 이 발표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내가 발표자도 아닌데,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건물 바닥이 기울기 시작했다. 어어- 나는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뛰었다. 하지만 그 세미나룸의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나만 정신없이 비상계단을 통해 건물을 빠져나왔다. 왜 아무도 나오지 않았지? 의문을 가진 순간, 꿈에서 깼다.
도대체 '진짜 퇴근'은 언제일까?
요즘 들어 심각하게 하는 고민이다. '진짜 퇴근'은 언제일까? 사실, 사무실에 기록되는 출퇴근 시간만 보자면 나는 시간 맞춰 잘도 퇴근하는 사람에 가깝다. 우리 회사 문화가 야근과 거리가 멀기도 하거니와, 탄력 출퇴근제 운영으로 칼출근- 칼퇴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9시 27분에 출근하면 18시 27분에 퇴근!) 그런데 '진짜 퇴근'이 언제냐고 묻고 있다니. 병원에서 오버타임하며 눈물 흘리던 그 시절을 벌써 잊어버리고 팔자 좋-은 소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퇴근 도장은 따박 따박 찍으면서, '진짜 퇴근'이 뭔지 고민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지난 수요일 퇴근길을 이야기해야겠다. 이틀만 존버 하면 되니 긍정적이라면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수요일 퇴근길. 나는 주말까지 남은 이틀 동안 끝내야 하는 일들을 헤아려봤다.(이게 첫 번째 단계다.) 아아. 잠깐 생각해도 남은 이틀, 16시간은 너무나 부족하다. 조금 더 효율적으로 일하자. 나는 업무의 우선순위와 각 업무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을 따져본다.(두 번째 단계다.) 그러면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번 프로모션 기획' 이라던가, '메디컬 컨텐츠 구성안' 따위의 업무의 구체적인 안으로 뻗쳐나간다.(세 번째 단계다.) 이 단계에서 적당히 마무리하면 다행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핸드폰 메모장에 '이건 처리할 때 누구에게 컨펌 후 진행', '이 컨텐츠 구성은 이렇게 저렇게' 등 구구절절 업무 디테일을 적다가 정신을 차린다. 이 단계까지 오면 퇴근 지문을 찍은 게 억울해진다.
최근 업무량이 불어나면서, 퇴근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그러다 기어이 꿈 까지 꾼 거다. 그 날 잠들기 직전 하던 생각이 내일 미팅 전 확인해야 할 문서 리스트였다.
간호직의 고통 vs 사무직의 고통
병원을 떠나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오만가지 새로운 것들을 겪었다. 그런데 모호한 퇴근의 경계, 이건 또 다른 세계다. 병원에서는 일단 퇴근하면 더 이상 일과 엮일 일이 없다. 병원 전산을 집으로 가져가겠는가, 환자를 데려가겠는가. 병원의 일은 병원에서 끝내고 가야 하기에, 하루 일과가 어찌 되었든 간호사는 퇴근과 동시에 업무와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빠이빠이다. 오버타임을 숱하게 하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지만, 야근은 지금도 아주 안 하는 것이 아니므로(...)
시간이 흐르고, 업무량이 늘면서 유일한 전 직장이 병원이었기에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이해하는 중이다. 휴가 가서도 거래처와 통화를 했다느니, 며칠 쉬고 돌아오면 메일함을 열어보기 두렵다느니 하는 것들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다시 말해, 사무직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
뭐가 더 힘드냐고 물으면, 글쎄. 잘 모르겠다. 병원 일은 단시간에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요구하지만, 퇴근 후에도 일에 시달리거나, 휴가를 내고도 잔업을 할 일은 없다.(물론 병원 생각은 하지만 그건 '일'이라기보다, '걱정'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업무 강도는 병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하지만 언제나 일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휴가를 쓸 때에도. 고통은 양 쪽 모두 지뢰처럼 깔려 있다. 다만 어떤 종류의 고통을 선택하느냐의 차이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