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일거리 사이에서 일을 '효율적으로', '잘' 하는 법이 간절하다
그러니까, 8월 말에 있었던 박람회가 시작이었다.
코엑스에서 열리는 큰 규모의 박람회에 우리 회사 서비스가 대대적으로 전시 부스를 열고, 포럼을 개최하게 되었다. 이(놈의) 전시를 위해 회사 전체가 난리였다. 특히 우리 팀은 8월 한 달을 모조리 올인해야 했다. 그래도 모자랐다. 하루하루 마감을 치고, 야근을 달고 살며 전속력으로 달렸던 불타는 여름이었다. 전시 막바지에는 잠을 자도 전시를 망치는 꿈만 다섯 시간 꾸다가 일어났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정신줄 붙잡고 큰 탈 없이 전시를 완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한 '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시 끝나면 한 숨 돌리고 쉬엄쉬엄 일 할 수 있겠지, 라는 믿음이 날 지탱해 주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될 것 같으면 인생이 아니지.
전시를 끝낸 뒤 맞는 첫 월요일. 이제는 한 숨 돌리겠거니,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한 나에게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일이 전혀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난 것이다. 알고 보니, 이 정도 큰 규모의 전시는 행사 후에 갈무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고, 때로는 전시보다 전시 후가 더 중요할 정도로 그 비중이 상당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될 수 있겠다: 상담 요청 고객 컨택, 방문자 DB 정리 및 통계 보고서 작성, 방문자 대상 뉴스레터 작성 및 발신, 새롭게 발생한 CS 처리 등. 이런 것도 모르고 전시 끝났다고 헤헤거리며 출근했다니. (절레절레)
게다가, 전시 일정으로 미뤄놨던 본래 업무들, 그러니까 근 한 달 동안 밀린 일들이 쓰나미처럼 몰아닥치고 있었다. 전시 갈무리와 밀린 업무들의 역풍을 맞다, 정신을 차리면 나는 또다시 야근의 늪이었다. 그다음 날에도, 그 다음다음 날에도, 그다음 주에도.
한 달째 야근하는 내 속도 모르고, 시간은 잘만 흘렀다. 전시회가 끝난 지 열흘이 더 지난 수요일 늦은 저녁이었다. 이 날도 진하게 야근을 하고,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나오는 참이었다. 시간이 늦어 한산해진 지하철 플랫폼에서 나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내가 계속 야근을 하는 이유는 내가 내 일을 제대로 쳐내질 못해서일까,
아니면 물리적으로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서일까.
혼자 고민해 봤자 답 없는 문제를 곱씹으며 나는 내 안에 원망을 쌓았다. 향해야 할 대상이 어딘지 몰라 그냥 나에게 쌓는 감정이었다. 원망과 함께, 서러움, 분노, 억울함도 쌓았다. 딱 죽을 것만 같았다. 중압감에 깔려 숨이 죄어오는데, 나를 짓누르는 실체는 무엇인지 흐릿해 잡히지가 않았다.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입사 일 년 만에, 처음으로 퇴사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물 젖은 퇴근길과, 퇴사 고민이라니. 정말로 내 한계구나. 나는 고민 끝에 금요일에 오후 반차를 냈다. 급하게 말씀드린 당일 반차였는데도 부장님은 내 낯빛을 한 번 확인하시고 푹 쉬고 오라고만 말씀해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반차를 냈지만 급한 업무를 마무리하느라 퇴근은 한 시간 늦어졌다. 그래도 이렇게 이른 시간에 사무실을 탈출한 것 자체가 극적이네, 생각하며 나는 지친 발걸음으로 귀가했다.
일요일 오후까지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만 잤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일요일 오후가 되자 드디어 머리에 빈 틈이 생긴 느낌이 들었다. 기운을 차린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나가 업무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나는 근 한 달간 이어온 야근의 연결고리를 간절히 끊고 싶었다. 사무실에서는 업무에 쫓겨 업무 정리할 시간도 없으니, 그나마 머리가 맑은 지금 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해야 할 업무를 리스트 업 하고, 각 업무들의 중요도와 긴급도를 꼼꼼히 따져 우선순위로 정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었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상사와 논의하는 것으로 표시했다. 막상 맘먹고 시작하니, 업무를 정리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해야 할 일들을 낱낱이 꺼내 드러낼수록, 지겹게 따라다녔던 중압감은 서서히 바스러져 사라졌다. 우선순위로 깔끔히 정렬된 업무 목록들을 살펴보며 나는 후련함을 느꼈다.
돌이켜보니, 마음이 바쁜 나머지 업무 점검 시간조차 사치라고 생각하고 마구잡이로 일을 해왔던 것이 패착이었다. 일은 하려면 끝이 없다. 바쁘다고 급해 보이는 일부터 마구잡이로 쳐냈던 지난 내 모습은 마치 떨어지는 테트리스 블록을 아무렇게나 배치하는 꼴과 같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닌데.
다음날, 나는 씩씩하게 출근해서 상사에게 업무 논의를 요청했다. 정리한 리스트를 함께 리뷰하며 업무량과 방향성에 대해 논의하고, 더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업무 플랜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 일정도 잡았다. 인원 충원도 이야기되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요즘은 '일 하는 법'에 대해 고찰 중이다. 병원에서 항상 단기 플랜을 세우고, 쳐내는 스타일로 일을 해왔기에, 장기전으로 일하는 방법에 대해 전혀 몰랐구나 싶다. 입사 초기에는 스콥이 작은 일만 해와서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만, 요즘 들어 나의 포지션이 명확해지고 회사 규모도 커지면서 일을 '효율적으로', '잘' 하는 법이 더욱 간절해진다. 쏟아지는 일거리의 무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중심을 잃지 않고 우직히 나아갈 수 있을까.
이 고민이 해결될 즈음엔 또 일 년이 훌쩍 지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