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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니 Dec 31. 2018

마케터 버전으로 세상 보기

출퇴근길 광고판은 내게 소리를 지르고, 브로셔는 자꾸만 쌓여갑니다.



간호사였던 시절에는 간호사 버전으로 세상을 봤다. 간호사 버전 세상을 살면 보이는 것들은 대략 이렇다.


응급실로 급히 들어오는 앰뷸런스(앰뷸런스에 타고 있는 사람이 내 환자가 아니길 바란다.)

사람들의 혈관(특히 혈관주사 쪼렙 시절엔 사람 얼굴보다 혈관이 먼저 보인다.)

각종 의학 드라마에서 환자들이 달고 있는 수액이나 부착물들(이때 옆에 있는 비의료인한테 아는척하면 유세 떤다고 욕먹기 십상)


간호사였을 때는 딱히 내가 '간호사 버전'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자각하지는 않았다. 최근에서야 내가 간호사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마케터 버전의 세상을 새로이 영접한 것이 그 이유다.



회사에 들어와 뻣뻣이 앉아있던 첫 주, 내게 첫 번째 업무가 주어졌다. 론칭을 목전에 둔 앱의 각종 마케팅 자료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감히 나 같은 초짜가 랜딩페이지와 앱스토어 소개 글을 작성해야 한다니, 당시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무게였다. 마케팅 자료를 써 본 일이 없기에 어떻게 시작해야할 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나는 고민하다 비슷한 성격의 서비스를 찾아 랜딩페이지를 하나씩 방문했다. 앱스토어에 들어가 요즘 핫 한 앱들의 소개도 읽어보았다. 다소 무식하긴 했지만 인풋이 어느정도 들어가니 대충 가늠이 갔다. 나는 여기저기서 얻은 아이디어를 그럴듯하게 이어 붙여 보고를 올렸다. 물론 상사의 수정을 거친 최종본은 내가 작성했던 첫 원고와 매우 달랐지만, 어쨌든 이 업무를 시작으로 나는 이런저런 마케팅 자료들을 작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마케터 버전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마케터 버전의 세계는 대략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의 광고판

각종 브로셔 디자인

길거리 X-배너

랜딩페이지의 카피와 레이아웃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SNS 광고

앱스토어의 앱 소개 글과 스크린샷


쉽게 말해, 집 밖을 나가거나, 핸드폰 화면을 켜면 접하게 되는 모든 광고가 눈에 밟히는 것이 마케터 버전의 세상이다. 조금 더 뾰족한 카피 문구를, 조금 더 눈에 띄는 브로셔 레이아웃을 고민해보기 전에는 절대 몰랐던 세상. 그동안 무심히 흘렸던 광고 카피 하나, 브로셔 디자인 하나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품이 들었을 지 이제야 조금 보인다.



사람들은 자기 시야만큼의 세상을 본다. 내가 간호사였을 때는 간호사 버전의 세상을 봤다. 그리고 마케팅에 발을 들여놓은 지금은 마케터 버전의 세상을 본다. 마케터 버전의 세상은 간호사 버전과 아주 다르다. 무엇보다 마케팅 자료는 도처에 깔려있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눈에 밟힌다. 마케터 버전의 세상을 알게 된 후로, 퇴근길 지하철 플랫폼에 서면 수 많은 광고판이 모두 참고자료 처럼 느껴진다.


뿐만 아니다. 브로셔는 필요 없더라도 우선 챙겼다가, 구성이 좋은 것들은 따로 모아 참고한다. SNS를 할 때 광고가 뜨면 어떤 톤으로 말하고 있는지 주의깊게 읽어본다. 다른 회사 랜딩페이지를 볼 때면 페이지 구성이 어떤지, 어떤 플로우를 따라 클릭을 유도하는지 살펴본다. 좋은 말로 하면 세상 전체가 참고할 마케팅 자료로 가득 차 있는 셈이고, 반대로 말하면 어딜 봐도 일을 하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마냥 신났다. 새로운 수학 개념을 배웠는데, 연습문제가 척척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 카피는 이런 의도로 쓰였구나. 브로셔 레이아웃을 이렇게 만들면 어떤 효과가 있구나. 여기 운영자는 이런 톤으로 글을 쓰네? 하며 신나게 문제를 풀어댔다. 하지만 세상에 참고할 마케팅 자료는 끝도 없이 많았고, 나의 작은 머리는 얼마 안가 과부하 에러가 떴다. 이제는 세상의 온갖 광고판이 허투루 보이지 않다 못해, 자길 좀 봐달라고 나를 향해 소리 지르는 느낌이었다. 병원을 나오면 조용해졌던 간호사의 세상과 달리, 마케터의 세상은 거짓말 좀 보태서 시각공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거, 너무 멀리 나간 건가 싶다. 농담 반 섞어 회사 상사에게 넌지시 나의 증상을 알려 봤다.


"과장님, 이제 광고가 허투루 보이지 않아요. 지하철을 타도, 길을 걸어도, 인스타그램을 봐도 광고 카피랑 디자인이 먼저 눈에 들어와요. 머리가 아플 지경이에요. 엉엉."


"그 맘 알지. 나는 길 가다가도 카피 이렇게 쓰면 훨씬 나을 텐데 하고 고쳐주고 싶고, 배너나 인쇄물 줄 간격이 안 맞은 걸 보면 굉장히 화가 나고 그래."




과장님 같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마케터도 광고가 눈에 밟히고(물론 나와는 다른 차원이었지만) 심지어 화가 난다니. 뜻밖의 대답이었다. 과장님의 이 말 한마디는 내게 꽤 위로와 안심이 되었다. 베테랑 마케터와 같은 세상을 보고 있다니! 어쨌든 내가 마케터 흉내라도 내고 있다는 증거처럼 여겨졌다.


요즘도 여전히 밖을 나서면 속 시끄러운 것은 같다. 그래도 이제는 기쁜 마음이 조금 더 크다. 광고판이 내게 소리 지른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마케팅이 뭔지 잘 모르지만, 관심 있는 만큼 보이고, 또 잘 알게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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