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
가장 예뻤던 20대 시절, 내 마음 한 구석에 꽤 오래 품고 있던 단어였다. 자기 연민. 이상하게 이 단어는 나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곤 했는데, 그 이유를 딱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자기 연민이라 함은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긴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그 저릿한 감정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이 단어를 타인을 대상으로 할 땐 조금 더 따뜻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는데.. 대상을 나를 바꾸자 다르게 다가왔다. 그냥 나를 딱하게 여기는 마음 그 정도일 뿐. 스스로를 엄격한 잣대에 두기를 즐겨했던 난, 나 힘든 것 좀 알아줘 종류의 어린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나를 가장 가까이 두고 있던 것이 불쌍했을지도.
팀장님을 처음 만난 곳은 첫 발령지였던 땅끝 시골지사였다. 그녀는 체납 민원인에게 소리 치는 것에
능하면서도 사색을 좋아하고 사택에서는 꽃 그림을 즐겨 그리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못했던 인턴의 마지막 퇴근길을 조용히 횡단보도까지 배웅하는 사람. 내가 할 만큼은 할 테니 너네도 너네 역할은 해내야지보다는 자신만의 경계만 지켜주길 바랐던 느낌. 강한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여렸고 가깝지만 가끔은 아주 멀게 느껴지는 그런 팀장님이 좋았다.
1년 후 그녀가 도시 지사로 발령이 난 날. 나와 우리 팀 또 다른 주임은 그녀와 포옹을 하며 울음을 삼켰는데, 그녀의 새 발령지에 화분을 보내자 바로 메신저를 보내 왔다.
- 1년 동안 너네도 키웠는데 이걸 또 키우라고?
그녀를 다시 만난 건 몇 년 후 인근 지사에서였다. 팀장과 팀원 사이로 다시 만나 편한 직원 몇 명과 술자리를 가진 때였다. 한 장소에 오래 있는 걸 싫어하는 팀장님은 1차에 잔맥으로 시작하여 2차에 맥주로 달군 후 옮겨진 마지막 오뎅바에선 초록색 병들을 테이블에 채워가기 시작했다. 술자리도 그녀다웠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그녀는 넌지시 내게 말했다.
- 그때 너는 유리 같았어. 손만 대면 깨질 것 같은. 소중히 다뤄야 할 사람 같았어
맞다. 나 그랬지. 그때 진짜 내 모습이었다. 아슬아슬한 사람. 손 대면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은. 좋아하는 사람이 말하는 적나라한 나의 모습에 부끄러움이 먼저 앞섰다. 우습게도 잘 숨기고 있다 생각했었는데 그녀는 역시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입사 초반 모든 게 어설픈 나에게 쓴소리 한번 안 하셨던 거구나. 지나고 생각해 보면 뭐가 그렇게 버거웠나 싶은데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간절히 그리며 견뎠다. 내가 선택한 길에 자기 연민을 느끼는 모순에 더 괴로운 나날이었다. 자책하고 그런 나를 안쓰러워하고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무엇이 그리 안타까웠을까.
초등학교 1학년, 온 집 안 가득 붙은 빨간 딱지를 바라보던 상실감 가득한 어린아이의 눈빛이?
19살부터 쉼 없이 이어진 아르바이트로 얻은 굳은살 가득한 오른발을 보는 게?
2층 주택 월세살이 시절 아래층 집주인 할아버지의 날 선 전화를 피하기 위해 까치발로 생활했던 지난 15년 간의 세월이?
대학교 자퇴 후 또래 친구들이 많이 타고 있는 109번 버스 노선을 피해 다녔던 추레한 내 모습이?
이제와 생각해 보면 나를 너무 아껴서,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원해서 그토록 나를 가엾이 여겼나 싶다. 그 시절의 나, 입사 후 20-22년의 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나온 것임을. 이런 세월들이 쌓여 나를 또렷한 이유 없이 가엾게만 여겼던 내가, 진짜 나를 ‘연민’하는 마음으로, 깊이 이해하고 돌보는 마음으로 뭉근히 향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어쩌면 사랑의 다른 말이 연민일지도 모르겠다. 정해진 좌표를 두고 천천히 나아가는 일. 그러다 어느 한 곳에 멈춰 가빠진 호흡을 고르며 잠시 멀리 바라보고 서 있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가는 것. 이게 나를 사랑하는 길이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선 내 모습이 필름카메라의 투박한 사진처럼
화려하고 쨍하지 못하더라도 찰나의 생생함을 담고 있길,
툴툴대며 떠나는 사람의 발 앞에 길 잃지 말라고 불 하나 놓아주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되어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