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함채원 Mar 29. 2023

0. 국제회의통역사로 살아가기

_에세이를 쓰다가 출판사가 사라지고

   

국제회의통역사를 주제로 책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무슨 패기였는지 1초 만에 OK를 외쳤다. 이후 1년 반 동안 글은 써지지 않고 마음의 짐만 커져 갔다.      


책을 쓸 때는 글감을 어떻게 하면 잘 풀어낼까를 고민해야 할 텐데, 1년 반은 자기검열하느라 훌쩍 시간이 가고 말았다.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되는 것일까. 통역사의 직업적 윤리 강령에 맞는 것일까. 나로 인해 통역사라는 직업에 흠집이 나면 어떻게 하나.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피해가 가거나 상처를 주면 어떻게 하나. 그렇게 하나씩 글감을 지워 가다 보니 지식백과에나 나올 법한 내용만 남게 되었다.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이야기밖에 남지 않았다. 앞으로 이 업으로 먹고 살 걸 생각하니 실패나 실수담을 너무 길게 써도 안 될 것 같았다. 그것조차 지워가니 남는 것은 직업 소개를 가장한 은근한 자기 자랑뿐이었다. 나는 이 책으로 뭘 전하고 싶었던 걸까? 혹시 이 책으로 마케팅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자기혐오가 밀려왔다. 책을 엎었다. 백지부터 다시 쓰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두 번째 여름을 지나 보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는 [국제회의통역사]라는 직업인의 무게를 오롯이 혼자 짊어지려고 했던 건 아닐까. 뭔가 거창하고, 대단해서 모두에게 칭송받는 그런 직업 세계를 보여 줘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나 보다.      


모든 직업에는 명암이 있다. 희로애락이 있다. 같은 직업을 영위해도 한 사람 한 사람 서로 다른 이야기가 있다. 타인에게 보여지는 순간과 그 순간을 위해 숨겨진 노력과 시간이 있다. 국제회의통역사답게(?) 통역하는 순간순간 많은 인사이트를 얻게 된다. 책의 방향성을 잡게 된 것도 한 동시통역의 순간에서 인사이트를 얻었다. 종종 아이돌이나 아티스트 관련 통역을 할 기회가 있는데, 하루는 제작물과 관련된 회의에서 ‘요즘은 어떤 컨텐츠가 사랑받을까?’하는 주제가 나왔다. 참석자들의 말을 통역하면서 함께 생각해 봤다. 나는 어떻더라? 어떤 컨텐츠에 매력을 느끼고, 진실성을 느끼고, 마음이 동하더라?      


답은 간단했다. 꾸며진 모습도 그렇지 않은 모습도 가감 없이 보고 싶었다. 블랙핑크의 오피셜 뮤직비디오가 나오면 그건 그대로 즐기고, 이후에 나오는 비하인드 영상도 챙겨본다. 준비 과정 역시 뮤비와 하나가 되어 그들의 작품과 그들 자체를 이해하게 되는 도구가 된다. 아티스트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그 자체로 수용할 뿐 해당 개인을 아티스트라는 직업 전체로 확대 해석하지 않는 분별력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형성이 된 듯 같다. 인생이 언제나 매끈한 도자기 표면 같을 수는 없다. 기성품이 아니니까. 어떤 곳은 모나고, 어떤 곳은 움푹 들어가고, 각자의 형태도 다르다. 다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개인의 역사와 경험은 때로 유용하다. 이슈 몰이를 하는 사람에게는 먹잇감이 되겠지만 그 아티스트를 응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개인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를 채워주고, 아티스트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꿈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타가 되기도 하고, 그 꿈이 실현되었을 때의 미래의 실체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변명이 구구절절 길어졌지만 이 책을 통해 독자 분들께 전하고 싶은 것은 단순하다. 국제회의통역사라는 직업의 세계를 거창하지 않게, 담백하게, 가감 없이 소개해보겠다는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저자 개인의 경험과 소회에 근거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책의 내용은 국제회의통역사라는 업을 대표하는 것도, 전체의 의견과 경험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밖에 몇 가지 양해를 구할 것이 있다. 어디까지나 이 책에 소개하는 내용은 공개 가능한 범위로 제한되어 있다. 통역사는 정부/기업/이해관계자의 대외비와 함께 살아간다. 비밀유지각서에 서명하기가 편의점 가는 횟수만큼 빈번하다. 때문에 이 글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공개 가능한 범위에서라는 제약이 있다. 때로는 단편적으로 느껴지거나 설명이 불충분하게 느껴지고 구체적 사례 없이 개념을 늘어놓게 되더라도 감안하고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물론 저자 개인에 관한 이야기는 되도록 많은 내용을, 꾸밈없이 담아 보려고 했다. 그간 강단에 서면서 또 개인 SNS 채널을 운영하면서 받아온 통역사와 관련된 많은 질문에도 답해보고자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로를 고민하는 10대 20대, 국제회의통역사를 지망하는 학생들, 이미 통역사로 발을 내디뎠지만 통역 현장의 이모저모가 궁금한 새내기 통역사들, 통역사 외 외연 확장을 고민하는 통역사들에게, 한 통역사의 지난 20년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작은 인사이트가 되기를 희망한다.       


-- 여기까지가 출판을 위해 썼던 머리말이었다. 한창 마감에 열을 올리던 겨울, 출간 계약을 했던 출판사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제 나는 마감의 부담을 벗어던지고 달콤한 해방을 맞이한 자유인일까? 갈 곳 잃은 오리알일까? 한동안 작업을 일시정지했다. 솔직히 해방감은 있었다. 3개월쯤 지나니 끝나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커졌다. 집필을 시작하기까지 정말 많은 고민을 거쳤는데 이대로 묻어버리고 없었던 일로 하기에는 속이 상했다. 인스타그램에 곧 책이 나온다고 큰소리친 것도 지켜야 했다. 분명 어디엔가는 통역사를 꿈꾸거나 또는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믿으며, 나의 작은 경험들을 우선은 브런치에 공유해보고자 한다.

이전 01화 1. 국제회의통역사의 어떤 하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