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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채원 Apr 16. 2023

2. 국제회의통역사가 하는 일 2/2


2. 동시통역_릴레이 통역과 피봇 


동시통역은 여러 언어가 함께 사용될 때 특히 유용하다. 일본어 통역사인 나는 주로 영어, 중국어가 같이 사용되는 현장에 가는 빈도가 높다. 동시통역으로 진행되면 한국어로 말하는 연사의 발언을 듣고 한->영, 한->중, 한->일로 실시간 통역이 가능하기 때문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 순차통역으로 한다고 가정하면 한국어 한 번, 영어 한 번, 중국어 한 번, 일본어 한 번 이렇게 한 발화당 추가로 3배의 시간이 든다.      


동시통역의 장점은 이런 시간 낭비 없이 실시간으로 여러 언어로 통역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것을 릴레이 통역이라 부른다. 통역사들끼리 언어라는 바톤을 전달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쉬운데, 영어 강연을 듣고 한영통역사가 한국어로 통역하면, 그걸 다시 한일통역사가 일본어로, 한중통역사가 중국어로 통역을 하는 것이다. 이때 가운데서 중심이 되어 타 언어 통역의 출발언어를 제공하는 통역사를 '회전축'에 빗대어 피봇 통역사라고 한다. 


피봇이 많아지는 날은 부담이 크다. 인지 부하도 커지고 심적 부하도 평소 보다 커진다. 다른 언어 통역사아게 '릴레이 받기 쉬운 통역'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술 관계를 타 언어 통역사가 인지하기 쉽도록 명확하게 전달해야 하고 때로는 부연설명을 덧붙이는 노력도 필요하다. 


일본어의 특징은 서술어를 흐리는 경우가 많고, 지구 세바퀴 정도 주어-서술어가 떨어져 있어도 어색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이 한국어로 그대로 통역되면 중국어나 영어 통역사에게는 진절머리 나는 릴레이가 된다. 때문에 피봇을 담당할 때는 의도적으로 서술어를 넣어주기도 하고 문장을 끊기도 한다. 


또 그 문화권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이나 고맥락 표현들은 이해하기 쉽도록 부연설명을 덧붙이는 작업도 필요하다. 한 번은 '일본에서 이에몬 살롱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라는 말이 연사 입에서 애드리브로 나온 일이 있었다. 사전에 공유된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차 브랜드가 운영하는 티 하우스, 이에몬 살롱', '한국의 오설록 같은 곳'처럼 덧붙인 적도 있었다. 길게 설명했지만 피봇 통역은 대략 할 일이 많아진다는 의미이다. 


청중들의 평가보다 더 냉정한 것이 동종업계의 평가이지 않는가. 때문에 통역사들끼리는 "나 이번 회의 다 피봇이야"는 말은 '내 실력이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날', '공개재판의 날'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고, 연사의 문제인지, 통역사의 문제인지 정도는 통역사들끼리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3. 위스퍼링 통역 


국제회의통역사의 주요 통역 업무 중 마지막은 위스퍼링 통역이다. 거의 동시통역과 비슷하게 시차가 없이 발화하지만, 한 명 또는 두 명 정도만을 대상으로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간략하게 요점만 통역한다는 특징이 있다. 수행 통역이나 공식 회의라 하더라도 부스 설치가 어려울 경우, 통역을 듣는 청중이 소수일 경우 이 방법이 쓰인다. VIP 통역 시에도 자주 쓰이는 방식인데 밀착 마킹을 해야 할 때 유용하다. 가까이에서 속삭여서 해야 하다보니 신경 쓸 게 하나 둘이 아닌데, 통역만 하기도 바쁜데 때로는 주변 상황이나 거리까지 주의하면서 통역해야 할 때도 있다. 여담이지만 한 번은 걸어가면서 위스퍼링 통역을 하다가 국무총리님의 발을 밟은 적도 있었다. 미안함도 잠시, 통역하는 데 집중하느라 사과도 제대로 못 드렸다. 지금도 떠올리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4. 국제회의통역사의 외연 확장 


국제회의통역사는 통역만 하지는 않는다. 말과 글은 하나로 언어의 총체를 이룬다. 말로 하는 것이 통역이라면 글로는 번역을 한다. 통역만 또는 번역만을 고수할 수도 있지만 국내 통번역대학원 출신의 국제회의통역사들 중 많은 수가 경계 없이 통번역을 겸무한다. 통역을 위해 번역을 해야할 때도, 번역을 하다가 관련 분야의 통역 의뢰를 받는 일도 부지기수다. 다루는 장르나 분야는 세상에 알려진, 알려지지 않은 모든 것을 아우르기 때문에 이 장에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그 밖에 국제회의통역사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업무도 다양하다. 우선 외국어-다언어 전문가이기 때문에 언어 관련된 업에 자연스럽게 연이 닿게 된다. 프리랜서 국제회의통역사로 일하면 다양한 업무를 경험할 수 있다. 지금 떠오르는 것만 나열해봐도 주로 각종 외국어 학과 및 통번역학과 등 학교 기관의 교수, 각종 사설 교육기관의 강사, 연구자, 국가 외국어 사업 프로젝트 담당자, 감수자, 외국어 시험 출제위원 및 심사위원, 교재 집필자, 이문화 강연자, 외국어 라디오 PD, 이중언어 MC, 에디터, 작가, 통번역 에이전시 대표 등을 들 수 있다. 특정 회사에서 전속으로 통역 업무를 담당하는 경우를 상근 통역사 또는 인하우스 통역사라고 부르는데, 통번역 업무만 전담하는 경우도 있고, 리서치 같은 관련 업무를 겸무하는 경우도 있어서 회사마다 다르다. 초기에는 통번역 업무만 전담하다가 연차가 쌓이면서 해외 사업이나 마케팅, 관리직 등으로 확장해가는 경우도 있다.     

 

프리랜서와 인하우스를 불문하고 요즘에는 직업과 취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개인 미디어가 활성화되면서 외연 확장의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통번역을 소재로 웹툰을 그리는 통역사도 있고, 제자 중에는 화과자 만들기 취미를 살려 화과자 작가로 글을 쓰는 통역사도 있다. 나 역시도 위의 통상적인 통역사들이 경험할 만한 일을 겸무하고 있다. NGO 단체나 학회, 협회 이사로도 활동하면서, 각종 교육 플랫폼들과 외국어 교육 커리큘럼 기획, 컨텐츠 개발을 하고 있다. '말하는 직업'의 특성과 강점을 살려서 기업 임원들이나 아티스트들의 스피치 코치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순차통역용 노트를 제작해 판매하면서 문구점 사장님도 간접 체험해보고 있다. 

  

이렇게 해서 국제회의통역사의 전형적인 업무 영역과 개별적인 외연 확장 범주를 소개해보았다. 이제 여러분은 국제회의통역사의 세계로 출발할 준비가 모두 완료되었다고 생각한다. 중간중간 소화 불량이 되지 않도록 필요한 내용들은 소개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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