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 바로 알기
‘어쩜 속기를 그렇게 잘 하시나요!’
10년도 더 전, 한 포럼이 끝나고 나이가 지긋한 신사분이 다가와 하신 말씀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미소를 가득 머금고 다가오실 때부터 뭔가 좋은 말씀을 해주시리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통역사의 일이 고되 보이는지 수고 많았다며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러 버전이 있는데 보통은 ‘통역 좋았습니다’, ‘일본어(한국어)를 어쩜 그렇게 잘 하시나요’, ‘한국분(일본분)이신가요’, ‘태어나서 통역이란 걸 처음 들었습니다’ 등등 다양하다. 그런데 예상 시나리오를 벗어나 ‘속기’ 칭찬을 받은 것이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노트에 끄적이는 내 모습을 보며 ‘아이고 손이 빠르네~’ 이렇게 생각하셨을 노신사분의 머릿속 풍경이 상상됐기 때문이다.
노신사께서 속기로 오해한 통역사들의 메모법은 노트테이킹이라 한다. 통역사들이 발언의 내용과 키워드,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메모 형식으로 간략하게 적는 것을 말한다. 들은 내용을 모두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기억의 보조장치로 사용한다. 일종의 컨닝 페이퍼 같은 것이라 보면 된다. 말하는 속도를 글씨 쓰는 속도가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속기처럼 다 적을 수는 없고, 숫자나 기관명/인명/지명 같은 고유명사, 자주 등장하는 어휘나 논리의 흐름 정도를 주로 적는 정도다. 직관적으로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기호나 약어로 쓴다. 나는 한자 변형을 해서 많이 적는데 정부는 广, 협조/협력 등은 †力 와 같이 사용하는 식이다. '생각하다'는 말은 만화책에 나오는 구름 같이 생긴 말풍선을 본 따서 구름 모양으로 그린다.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딱히 정해진 공식은 없다. 중요한 건 통역을 잘 하는 거지, 노트를 예쁘게 쓰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속기를 잘 한다고 통역을 잘 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통역사마다 각자 보기 편한 노트테이킹 방식을 만들고 발전시킨다.
직업의 세계는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나도 직접 책을 써보기 전까지 출판사 편집자들의 속사정을 알 수 없었는데, 어떤 저자들은 이름만 걸어놓고 편집자들이 대필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은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직접 쓰고 있다)
실력 있는 속기사로 오해를 받은 것은 빙산의 일각, 통역사들의 일도 오해와 편견이 늘 따라다닌다. 통역사들이 받는 흔한 오해는 무엇일까.
가장 흔한 것이 '통역은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와 같다'는 오해일 듯 하다.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문통역사로 입사했던 첫 직장에는 국제회의통역사가 나 하나, 조직구성원은 1,600명이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에서 메일과 메신저, 전화로 문의가 쏟아졌다. 행동파들은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갑자기 양자역학 수준의 기술서를 쓱 내밀고 지금부터 직독직해를 해달라는 상무님, 추사 김정희도 울고 갈 고어 흘림체를 '지금 당장' 해석해달라는 전무님, 맥락 없이 신조어 한 문장만 캡쳐해서 ‘이게 무슨 말이에요’ 질문하는 수석님. 한결같이 “전문가니까 보면 바로 나오는 거 아니에요?” 칭찬을 가장한 오해가 따라다녔다.
한 번은 식사 자리에서 밥을 먹던 중 갑자기 호명되어 어떤 장관님의 말씀을 통역하게 된 일이 있었다. 통역사로 업무 요청을 받고 간 자리도 아니어서 노트 조차 없던지라 일단 눈에 보인 호텔 메뉴 종이 뒤에 노트테이킹을 한 적도 있었다. 밥알도 채 넘기지 못 한 채 첫 문장을 시작했다. 전문통역사가 계시니 다행이라며 띄워주었지만 내게는 급작스러운 노동의 현장이었을 뿐이었다. 주최측 일원이었기에 책임감을 갖고 했을 뿐, 업무가 아닌 자리에서 통역 요청을 받으면 통역사 함채원씨는 이미 퇴근해서 어렵다고 웃으며 거절하고 있다.
이런 오해는 통역이 단순히 2개 이상 언어만 잘 하면 된다는 편견에서 비롯된다. 통역을 1대 1 단어 치환이라고 보는 착각,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1:1로 옮기기만 하면 된다고 보는 착각에서 온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통역사를 앵무새나 기계에 빗대기도 한다(통역하는 앵무새는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비유도 잘못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의외로 통역사들은 들은 그대로를 말하지 않는다. 1:1 대응으로 통역할지 관용법을 사용할지, 설명을 추가할지 뺄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통역을 '하지 않는' 전략을 선택하기도 한다. 한 번은 한 정치인이 문제가 될 법한 성적 발언을 해서 그 말을 의도적으로 통역하지 않는 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통역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언어 능력도 1:1 치환 능력도, 노트테이킹 스킬도 통역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통역에서 더 중요한 것은 순간적인 의사결정 능력이다. 여기에서 의사결정이란 통역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다. 심지어 순간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번역과 달리 생각할 시간이 충분치 않다. 고양이가 날아오는 카드를 낚아채듯 동물적으로 순간적으로 전략을 결정해야 한다. 통역은 무수한 점점의 의사결정이 이어져서 만들어지는 선과 같다.
전략을 선택하려면 먼저 그 발언이 일어나는 전체 상황과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통역을 하는 상황이 나라를 대표하는 정상들의 공식 석상일지, 비공개로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인지에 따라 통역 전략은 달라진다.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학회와 기업간 협상 테이블에서의 통역 전략도 다르다.
연사의 말을 ‘분석, 종합, 이해’하는 과정도 필수다. 통역사는 노트테이킹을 하고 있어도 쓰는 것보다 이해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다. 통역사는 이어서 이해한 바를 토대로 통역어를 ‘적절하게’ 선택해야 한다. 이 ‘적절하게’에는 많은 함의가 있는데, 여러 변수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통역이 필요한 연사와 청중 간에는 기본적으로 언어, 문화, 사회, 역사 정보의 간극이 있다.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해당 문화 고유의 개념어들도 있다(문화소라 부른다). 통역사는 이러한 부분을 파악하고 어떻게 조율해야 할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연사와 청중이 같아도 소통의 목적이나 상황에 따라 통역 전략은 달라질 수 있다. 아무리 설명과 첨언이 필요한 개념이라 해도 동시통역에서는 시간의 제약도 고려해야 한다. 이 변수를 순간적으로 고려해서 판단해야 하는 것도 통역사의 일이다.
앞 장에서 이에몬 살롱에 대해 '일본의 오설록 같은'이라는 설명을 덧붙인 일화를 소개했는데, 그 글을 쓴 이틀 후쯤 흥미롭게도 반대의 상황이 있었다. 지난 번에는 연사가 일본 사람, 청중이 한국 사람인 상황이었는데 이번에는 연사가 한국 사람, 청중이 일본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동시통역이 아니라 순차통역이어서 청중들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있었다. 한국측에서 귀한 분들 오셨기에 '오설록' 티 세트를 준비했다며 내밀었다. 일본 사람들은 연실 감사하다며 받지만 오설록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 잘됐다 싶어서 '이에몬살롱 같은 브랜드입니다'라고 살짝 귀띔했다. 현장에 있던 일본 사람들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오! 바로 이해됐어요'라고 말했다. 상황을 보고 순간적인 판단을 통해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것이 통역사의 일이다. 만약 이들이 단순히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티 유통 시장 현황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통역을 의뢰한 것이라면 선택해야 할 전략은 달라질 것이다. 한국의 오랜 화장품 회사 아모레 퍼시픽이 만든 티 브랜드로, 티 제품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티 하우스도 운영하고 있다와 같이 회사 개요나 비즈니스 내용을 설명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정보가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에 정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통역 전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통역사들은 통역을 의뢰받은 직후부터 통역하는 매분 매초 끊임없이 ‘의사결정’을 한다(실제 사례는 맨 아래 부분에 넣어두겠다. 내용이 난해할 수 있어서 관심 있는 분만 보는 것으로!). 음차만 할 것인지, 상위어 하위어로 대체할 것인지, 부연 설명을 덧붙일 것인지, 그렇다면 어디까지 설명을 덧붙일 것인지, 때로는 전략적으로 생략 삭제할 것인지. 통역하는 매순간 뇌 속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 심지어 그때그때 의사결정의 결과는 최선일 뿐 최고의 선택이 아닐 때도 많다. 실패나 아쉬움이 늘 따르는 것도 이 직업의 일면이다. 이럴 때는 다음을 기약하며 빠르게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분석하고 더 갈고 닦는 수밖에 없다.
사람의 의사결정능력에도 총량의 법칙이 있는 것일까. 매 순간 어휘, 표현, 전략을 선택하다 보니 끝나고 나면 소진돼서 저녁 메뉴를 고를 기력이 안 남을 때도 있다. 어딘가에서 통역하는 통역사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한 번 상상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지금 이 통역은 어떤 의사결정의 결과일까? 그 뇌 속에 펼쳐지는 전쟁의 순간을 상상해보면 좋겠다. 센스 있게 슬쩍 저녁 메뉴도 추천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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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사례입니다!
한 번은 신라시대와 중국-일본 고대의 추석과 백중 문화를 비교하는 학회 때의 일이다. 일본인 학자가 일본 고대의 오봉 문화에 대해 소개를 했다. 일본의 오봉은 일본인에게 어떤 연중행사이고 무엇을 먹고, 어떤 의식을 올리고 장식을 하는지를 쭈욱 소개하는 자리였다. 통역 준비를 하면서 고민을 많이 한 부분은 쇼레이우마라고 하는 장식품에 관한 이야기였다. 쇼레이우마는 한국식으로 한자를 읽으면 정령마인데, 오이나 가지로 말 모양을 만든 장식품을 말한다. 각 가정에서 조상님들의 귀향을 환영하는 의미로 만들어 문앞에 장식한다.
이 때 일본 연사가 ‘오봉 때는 쇼레이우마를 문앞에 장식합니다’라고 일본어로 말했다고 해보자. 통역 전략은 여러 가지 가능하다.
1) 1:1로 대응시켜 '오봉 때는 쇼레이우마를 문앞에 장식합니다’로 통역할 수도 있고,
2) '일본에서는 백중 때 이런 장식을 합니다’처럼 굳이 직접적인 설명 없이 간접적으로 통역할 수도 있다.
3) 반대로 '쇼레이우마라는 명칭은 정령들이 타고 오는 말이라는 의미로 정령마에서 온 것이며, 각 가정에서 오이와 가지로 만든다'는 개념 설명까지 덧붙일 수도 있다.
이 판단을 하는 기준은 청중의 정보 간극, 그리고 해당 소통의 목적이다.
1)번 통역 전략은 한국 참석자가 일본어 일본문화 전문가나 일본에 오래 산 사람들이 아니라면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2)번 통역은 이후 쇼레이우마에 관한 세부사항 논의가 나올 경우 다시 설명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일반 강연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세부적인 사항을 논의하는 학회 자리였고 쇼레이우마는 꽤 중요한 키워드였다.
심지어 한중일 회의라는 점도 고려해야 했다. 중국어는 모든 한자로 전달을 해야 하는데 쇼레이우마가 정령마라는 정보가 없다면 음차로만 통역해야하고 내용 파악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통역하는 매순간 뇌 속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
이런 변수들을 고려한 나의 최종 의사결정은 3)번이었다. ‘일본의 백중, 오봉 명절에는 쇼레이우마라는 것을 장식합니다. 직역하면 정령마인데 오이나 가지로 만든 말 모양입니다’. 당연히 중국어 통역사와도 사전에 이 키워드를 이렇게 통역하겠다는 것을 공유해두었다. 문제는 일본 연사가 ‘오봉 때는 쇼레이우마를 문앞에 장식합니다’고 말하는 동안 저 문장을 다 말해야 하니 통역사가 바빠진다는 것이다. 다음 시작하는 문장도 들어야 하니 부하는 더 컸지만, 소통 목적에 맞으면서 청중들에게도 적절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