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에 서면서, 일하면서, SNS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많이 받는 질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일본어를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나요?" 다른 하나는 "왜 통역사가 되기로 하셨나요?"이다. 결이 비슷해보이는 두 질문이지만 나의 답은 다르다. 하나는 환경적인 요소가 크고 다른 하나는 진지한 고민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케이스는 아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어린 시절부터 일본어에 노출이 되어 있었다. 계기는 오롯이 할머니 덕분이었다. 할머니가 일본어를 원어민처럼 하셨다. 집과 3분 거리 할머니댁에 거의 맡겨지다시피 하며 막내딸처럼 자랐더니 걸음마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듣고 말하게 되었다. (조기교육이 이렇게 무섭다)
일본어는 나에게 가족과 보낸 시간의 일부 같은 것이었다. 태어나서 가장 처음 배웠던 노래는 일본 노래였다. “시바카리 나와나이 와라지오 츠쿠리, 오야노 테오 스케, 오토오토오 세와시……” 할머니는 항상 귤을 양손에 들고 저글링 비슷하게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던지면서 이 노래를 불러주셨다. 실 뜨기를 할 때도, 밀가루 꽈배기 과자를 만들어주실 때도 이 노래를 흥얼대셨다. 언제 익혔는지 모르게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도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서른이 넘어 기억 속 남은 가사를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무려 1900년대 초 민요라고 했다. 풀 베고, 새끼 꼬고, 짚신 만들고, 동생을 돌보는 내용이었다.
할머니는 글로벌 시대를 예견하시고 일본어를 해 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것일까? 아니면 당신이 이중언어구사자이기에 손녀와 감성을 나누고 싶으셨던 것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할머니와 일본어로 대화하는 일은 즐거웠다. 당시는 할머니랑 둘이 쓰는 말이라 생각했을 뿐, 일본어인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읽고 쓰기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아버지께 배웠다. 1980년대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으로 외국어 학습 붐이 한창 일던 시기였다. 독학으로 일본어를 공부하신 아버지는 88올림픽에 일본어 자원봉사로 나서게 되셨고, 덕분에 우리 집의 저녁시간은 일본어 공부 시간이 되었다. '고레와 난데스까? 이것은 무엇입니까?', '소레와 펜데스. 그것은 펜입니다.' 지금 떠올리면 교과서 1과에나 나올 것 같은 판에 박힌 문장들뿐이었지만 바쁜 아버지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지금도 고레와 난데스까를 들으면 괜스레 추억 버튼이 자동으로 눌러지는 느낌이다. 그 순간의 공기, 사각사각 연필로 써내려가는 그 순간의 소리와 촉감을 지금도 기억한다.
집에서는 할머니, 아버지와 일본어를 섞어서 대화했다. 요즘말로 하면 한국어와 일본어가 뒤섞인 한본어쯤 되려나... 우리집만의 언어였다. 물론 일본으로 대학 진학을 결심하고 입시를 앞두고는 어려운 단어나 관용구, 경어 같은 말을 새로 배워야 했다. 일본에 가서도 수업 발표, 아르바이트, 친구들 모임, 면접 등등 상황에 맞는 일본어가 모두 달라서 다시 배워야 했지만 그 순간마저도 즐거웠다.
일본어는 그렇게 할머니와 나, 아버지와 내가 함께 하는 추억 속에 늘 녹아 있었다. 일본어를 하면 따뜻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어린 시절부터 늘 노출되어서였을까, 일본 대학으로 진학을 결정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 같았다. 부모님도 반대하지 않으셨고 시험도 쉽게 붙었고 일사천리였다. 일본에 가서도 금세 적응이 되었다. 그냥 살던 곳 같이 친숙했고 밥도 맛있고, 학교 생활도 즐겁고, 주변 사람들도 좋았고, 아르바이트까지도 재밌었다. 심지어 그 나이대는 '부모님 간섭이 없는 삶'을 꿈꾸지 않는가. 십대후반 이십대 초반 젊은 피에게 외국에서의 자취는 그 자체로 매일이 축제였다. 당시에는 인터넷은 커녕, 핸드폰으로는 국제전화 수신도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완벽한 해방을 만끽하는 부수적 이득(?)도 있었다. 졸업을 하면 이대로 자연스럽게 취업이 되고 그대로 일본에 평생 눌러 살 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을 마주하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