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국제회의통역사가 하는 일을 한 번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현직 통역사나 통번역대학원 재학생, 실제로 통번역업계에 대해 정통하신 분들은 이 챕터를 스킵하셔도 좋다. 국제회의통역사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가 과거에 비해 많이 확산되고는 있으나, 업의 특성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어떤 일을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떠올리기 어렵다는 분들도 많다. 집필 의뢰를 받고도 편집자님과 국제회의통역사의 업무 영역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어야 할 정도였다. 국제회의통역사라는 직업의 명칭조차 생경하게 여기는 분들도 많다는 것도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챕터에서는 이 책을 읽어 가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국제회의통역사의 주요 업무인 ‘통역’을 소개하고자 한다. 또 멀티 플레이어를 요구받는 최근 추세에 맞춰 국제회의통역사들은 ‘통역’ 외에도 다양한 외연 확장을 하고 있다. 이 책 후반부에서는 통역사의 외연 확장에 대한 경험을 다룰 예정이므로 미리 간략하게 소개해두고자 한다.
안현모 씨가 방송에 나오면서 통역사에 대해 대중적 인지도가 더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통역사를 용접공에 비유를 해준 것도 공감이 되었다. 술을 빚는 주조 장인이나 부채 장인, 발효식품 장인을 보면서 통역사의 업무 과정을 투영한 경험이 개인적으로도 많았기 때문이다.
통역사는 언어를 도구로 삼아서 통역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능인이다. 부연 설명을 해본다면 이중 언어 능력과 통역 스킬을 토대로 서로 다른 언어, 사회, 문화 그리고 사람을 연결하는 소통의 전문가이다.
이 직업의 정확한 명칭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국제회의통역사'이다. 보통 앞에 언어 조합을 넣어서 한일, 한영, 한중, 한불, 한독, 한아, 한노+국제회의통역사라고 부른다. 아마 사회적으로 더 친숙한 이름은 '동시통역사'일지 모르겠다. 다만 국제회의통역사가 담당하는 통역의 종류는 동시통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방식으로 구분한다면 순차통역, 동시통역, 위스퍼링 통역이 있다.
1. 순차통역
언론에 노출이 자주 되어 흔히 대중들의 눈에 익숙한 통역 방식은 순차통역이다. 연사가 통역사가 같은 공간에 있고, 연사가 일정 길이를 끊어서 말하면 통역사가 통역을 하는 방식이다. 연사의 발언과 통역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순차통역이라고 부른다. 탁구처럼 핑퐁핑퐁 순차적으로 발언과 통역을 주고받는다. 대표적으로 국가 정상의 양자 회담 때 대통령들이나 총리들 옆에 앉아 있는 통역사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트럼프 미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할 때의 통역 방식 역시 순차통역이다. 과거, 영화 “기생충” 시상식에서도 봉준호 감독이 한국어로 수상 소감을 말하고 샤론 최가 영어로 통역한 것도 순차통역 방식이었다.
순차통역은 일정 시간 듣고 통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기억의 보조수단으로 간략하게 메모를 한다. 이것을 노트테이킹이라고 부른다. 발언의 얼개나 고유명사, 핵심 키워드를 적는 것인데, 방식은 통역사마다 방식은 다르다. 노트테이킹은 필수도 아니다. 짧은 발화나 익숙한 분야라면 온전히 기억해서 발화도 가능하다. 반대로 통역 현장에서는 처음 접하는 전문 분야를 3분, 5분 이상 끊지 않고 듣고 통역해야 하는 경우도 흔한데, 이때는 노트테이킹의 의존도가 상당이 높아진다(A와 B를 C 해서 D의 3승을 했더니 F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었으나...와 같이 마치 암호처럼 들린다). 전문 분야가 아니더라도 주요 인사의 발언은 토씨 하나, 뉘앙스 하나도 달라지면 안 되기 때문에 노트테이킹을 하기도 한다. TV에서 양자 회담 때 유심히 보면 통역사들이 노트에 뭔가를 메모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순차통역은 연사와 연단이나 회의석에 동석하기 때문에 퍼포먼스의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 연사의 발언이 끝나면 청중의 눈과 귀가 그대로 통역사에게 옮겨가기 때문이다. 방송가에서는 3초만 오디오가 비어도 방송사고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순차통역 세계에도 이 말이 적용된다. 연사의 말이 끝나는 즉시 뭐라도 말을 꺼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따른다.
초년병 때는 무대가 크고 청중이 많거나, 카메라가 타이트하게 통역사 얼굴을 비추거나, 청중의 표정이 괜스레 험악해 보일 때 이 퍼포먼스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 통역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과 별개로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을 뛰어넘는 것이 통역사의 숙명이다. 통역사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개 1-2년이면 익숙해진다. 청중과 호흡하는 순간과 짜릿함 덕분에 순차통역을 더 선호한다는 사람도 있다.
2. 동시통역
순차통역이 탁구처럼 핑퐁핑퐁 순차적으로 발언과 통역을 주고받는 방식이라면 동시통역은 연사의 발화와 통역이 동시에 진행된다. 사실 완벽하게 시차가 없을 수는 없다. 연사가 발화를 시작해야 그것이 인풋이 되어 통역사의 인지 처리 = 뇌와 입을 거쳐 아웃풋으로 산출되기 때문이다. 어순이 같은 일본어조차도 1-2초 정도의 시차를 두고 통역이 이루어진다. 영어나 중국어는 한국어와 어순이 다르기 때문에 목적어가 나올 때까지 약간의 텀이 생기거나 동사가 먼저 통역되기도 한다.
언어 불문, 중간중간 부연 설명이 필요하거나 인지 처리에 난이도가 있는 발화는 통역이 길어질 수 있다. 반대로 맥락이 지극히 예측 가능한 상황에는 발언보다 통역이 먼저 끝나기도 한다. 혹시 독심술도 터득했느냐는 질문도 가끔 받는데 그건 아니다. 회의의 취지나 발언자의 입장, 발화의 논리 구조나 전반적인 맥락만만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드라마를 보다가 다음 대사가 저절로 떠오르는 그런 거라 보면 된다. 물론 그 바탕에는 연사의 발표 내용을 이해하고자 한 숱한 노력이 숨겨져 있다. 오랜 세월 사람의 말에 온 신경을 쓰다 보니 독심술까지는 아니더라도 독순술 정도는 터득한 것 같다. 코로나로 마스크를 쓰면서 발휘할 기회가 적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동시통역은 국제회의통역사의 업무 중 가장 핵심이자 꽃이라 불린다. TV에서 본 적 있는 분이라면 올림픽 개폐회식, 글로벌 속보가 나올 때 원어 위에 통역이 깔리는 순간을 떠올리면 된다. 한 언어를 듣고 약간의 시차를 두고 다른 언어로 통역한다. 통번역대학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 동시통역을 두고 ‘초고속 다중정보처리 방식’이라고 소개한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는데, 기계 소개서에 있을 법한 수식어가 인간이 하는 일에 사용된다는 점에서였다. AI가 발달하고 Chat GPT가 나와도 아직 동시통역이라는 작업은 기계로 대체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
동시통역이 필요한 곳은 방송통역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대한민국 서울에서만 하루에 수십-백 건 이상 국제회의가 열린다. 코로나로 인해 원격 국제회의가 확대된 것도 동시통역의 수요를 가중시켰다.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있는 이 순간에도 주변의 호텔, 컨벤션, 대학교, 관공서, 그리고 수많은 기업에서 국제회의가 개최되고 있다. 그중 80%는 국제회의통역사가 함께 하고 있을 것이다. 20%는 영어 같은 특정 언어로만 소통한다거나, 통역사가 아닌 사내 직원이 통역 업무를 맡을 가능성도 있으니 그 몫으로 남겨두었다. 이 수치는 저자 개인의 감과 경험에 의거한 것일 뿐, 통계에 의거한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동시통역은 동시통역사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다. 처음부터 동시통역사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후천적으로 학습을 통해 길러지는 능력인 만큼 소정의 훈련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국내에서는 전문대학원으로 인가받은 통번역대학원에서 교과과정을 이수하고 졸업시험을 통과하면 동시통역이 가능한 국제회의통역사 자격으로 인정받는다.
동시통역은 연사와 공간 분리가 필수이기 때문에 ‘통역부스’라는 공간을 설치한다. EU나 UN처럼 건물에 빌트인으로 여러 언어용 부스가 설치된 곳도 있지만, 조립식 간이부스를 따로 설치하는 일도 많다. 주로 연단이 잘 보이는 회의장 한 켠에 설치되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무대 뒤나 다른 회의실에 설치된다. 사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일반 청중들은 살면서 통역부스와 ‘조우’할 일이 많지 않다. 통역 부스 안에 있으면 관계자나 청중분들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늘어간다.
동시통역은 공간 분리로 인해 행사장 음향 장비와 통역 장비가 필수적이다. 통역 장비는 기본적으로 연사의 말을 듣기 위한 헤드폰과 통역사의 통역을 청중에게 전하기 위한 마이크, 언어를 한국어/일본어/영어/중국어로 분리해서 송출해 주는 시스템 장비, 그리고 청중들이 언어를 선택해서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수신기가 있다. 간혹 의뢰인 중에 통역사를 부르면 부스가 딸려올 것으로 오해하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한다. 통역사는 통역 전문가이지 기술 전문가는 아니므로 통역 장비는 별도 장비전문가에게 의뢰를 해야 한다.
동시통역의 역사는 사실 아직 100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기술적인 문제에 있었다. 장비 사용이 필수적이다 보니 처음 도입된 것은 기술적인 구현이 가능했던 현대 이후였다. 첫 시도는 1945년 뉘른베르크 군사재판, 2차 세계대전 전범재판 때였다. 반면 기기를 사용하는 만큼 전파 유출이나 도청 등의 위험성도 있어서 기밀성이 높아 보안이 엄중한 회의에서는 순차통역을 선호하는 편이다.
동시통역은 여러 주체들과의 협연이기 때문에 연사 혼자만 통역사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원활한 통역을 위해서는 연사와의 사전 조율이 물론 주최측, 행사 연출 운영팀, 통역 장비팀, 때로는 청중에 이르기까지 관계자 간 긴밀한 협업이 필수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회의 때는 예기치 않는 돌발 상황이 빈번한데, 뒤편에서 여러 에피소드를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