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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채원 Apr 13. 2023

1. 국제회의통역사의 어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 

팟     


눈을 떴다. 새벽 4시 29분. 긴장 탓인가, 오늘도 알람이 울리기 직전에 일어났다. 또 통역하는 꿈을 꿨다. 남자들은 군대 가는 꿈, 대학생들은 수능 보는 꿈을 그렇게 꾼다던데. 통역사라 그런지 통역하는 꿈을 가끔 꾼다. 통역 장비에 꼽혀 있어야 할 이어폰 선이 구렁이가 담 넘어 오듯 꾸물꾸물 통역 부스 벽을 타고 넘어 오는 지점에서 꿈인 걸 알았지만. 꿈 속에서 필사적으로 통역을 한 탓일까, 하루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뇌에 과부하가 온 느낌이다. 머리가 복작댄다.


꾸물댈 시간이 없다. 오늘은 아침부터 밤까지 일정이 빼곡하다. 오전에는 서울 시내 호텔에서 다음 주 행사 리허설이 있고, 오후부터 밤까지는 일산에서 방송국 프로그램 동시통역이 예정되어 있다. 내일부터 3일간은 일본 출장이니 짐도 싸야 한다.

   

프리랜서 통역사에게 매일을 다른 지역에서 보내는 일은 흔하다. 안부를 물을 때 첫 인사가 ‘오늘은 어느 도에 계시나요?’일 때도 있다. 통역사들끼리는 스스로를 현대판 장돌뱅이, 프로 봇짐러, 이삿짐 센터에 비유하기도 한다. 월요일은 부산, 화요일은 인천, 수목은 오사카, 다시 금요일은 광주, 토요일은 부산 찍고 서울, 다시 일요일부터는 오키나와, 돌아와서는 바로 경주... 어느 가을의 한 주 간 일정이었다. 일본어 통역사인지라 그나마 해외 출장을 가도 일본이라는 것이 다행일 때도 있다. 영어, 유럽어와 아랍어 통역사들이 세계 전역을 다니며 장거리 비행과 시차와 싸울 때 적어도 그런 어려움은 없으니까 말이다.


4시 40분. 아메리카노를 한 잔 내린다. 일 시작 전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다. 서른 전까지 커피라고는 삼각형 커피 우유밖에 못 먹었던 내가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는 커피를 달고 산다. 꼬마자동차 붕붕이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 것처럼 커피향을 맡으면 갑자기 집중 버튼이 켜지는 것 같다. (왠지 나이가 티날 것 같아서 이 부분은 지워야할 지도 모르겠다)  


PC를 켜고 오전 리허설 행사 자료를 열어 본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님의 출판기념회. 오늘은 진행 순서와 동선을 맞추는 드라이 리허설이다. 사회자 겸 통역사로 연단에 서게 되어 진행은 물론 총리님 강연 통역까지도 맡게 되었다. 책임이 막중하다. 진행 시나리오는 아직 초안이라 듬성듬성하다. 키워드는 [탈대일본주의]. 며칠 동안 총리님 저서도 읽고 지난 발자취도 훑어봤지만 머리 속이 백지 같다. 뽑아놓은 자료가 책상 한가득인데... 덜컥 겁이 난다. 행사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어떻게든 그때까지 버튼만 누르면 나올 정도로 만들어놓아야 한다.  


이제 7시. 오후에 있을 동시통역 준비를 시작한다. 출력해둔 자료를 읽으며 혼자 셀프 퀴즈로 고유명사와 용어를 맞춰본다. 통역을 위한 나만의 준비물을 챙겨 넣는다. 자료와 용어는 분실을 대비해 두 개씩 출력, 노트북과 통역용 이어폰, 각종 충전기와 전자사전, 스카치테이프, 가위, 포스트잇을 넣는다. 특이하게 동시통역과 순차통역을 섞어서 하는 통역이라 순차통역용 노트도 챙긴다. 개인 스탠드를 따로 챙겨넣는다. 요즘 어두컴컴한 동시통역 부스 안에 오래 있었던 탓인지 눈이 침침해진 것 같다. 행사장에 물이 없을 수도 있어서 개인 텀블러를 챙기고, 카페인 충전을 위한 커피도 미리 뽑아간다. 귀가 시간은 아마 밤 12시가 가까울테니 기본적인 생필품까지 챙겨 넣으니 오늘도 이삿짐이 생성된다. 서로 다른 성격의 행사라 갈아입을 의상과 신발을 챙긴다. 가방이 하나, 둘, 셋, 그리고 의상 짐까지 총 넷이다. 팔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      


8시 반. 이동하는 차 안에서 틈새시간을 이용해 매일의 루틴을 실행한다. 뉴스 쉐도잉을 하면서 시사 이슈를 훑고 입을 풀어본다. 오전 행사 성격에 맞게 발성 연습을 한다. 한국어 진행, 일본어 진행, 한국어 순차, 일본어 순차, 한국어 동시, 일본어 동시. 각각의 용도에 맞게 목소리를 다르게 쓰고 있다. 특히 동시통역은 통역사의 입모양이나 표정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오롯이 목소리로만 의미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청중에게 더 잘 들리는 발성법을 사용하려고 한다.


9시 반. 호텔 행사장 문을 열고 들어선다. 1번이다. 의자 하나 없는 텅 빈 공간에 햇살이 쏟아진다. 당일에는 사람들의 열기로 꽉 차겠지? 벌써부터 설렌다.      


10시 반. 리허설은 순식간에 끝났다. 문제는 당일 무자료 순차통역이겠지만. 본업이 통역사기 때문에 진행 의뢰를 받아도 종국에는 항상 순차통역을 하게 된다. 남은 일주일간 내가 총리님이 되었다 생각하고 모든 내용을 소화해야겠다 다짐한다.      


11시 반. 다음 행선지인 일산 JTBC에 도착했다. 방송이라 리허설이 있을 예정이지만 17시 예정이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일할 때는 일찍 가는 편인데 20대 후반 프리랜서 첫 해 때 겪은 무서운 일 때문이다. 아침 러시아워에 휘말려 시작 1분 전에 턱걸이로 들어간 그 곳은 노다 일본 총리님의 간담회 자리였다. 아침에 여유롭게 고기까지 구워 먹고 출근했건만 예상을 훌쩍 넘어 꼼짝 않던 그 택시 안에서 얼마나 애가 탔던지 모른다. 택시에서 뛰쳐나와 지하철로 갈아타고 역에서 호텔까지 전력 질주하는 내내 내 머리는 '늦으면 어쩌지'에 지배 당한 느낌이었다. 햇병아리여서 VIP 행사는 비표 배부와 짐 검사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가방 지참도 제지 당해서 노트와 펜 한 자루만 가지고 허둥지둥 뛰어들어갔다. 이제 살았다 싶었던 그 때 노트 위 글자가 점점 흐릿해져갔다. 하... 등골이 오싹해졌다. 펜에 심이 거의 떨어졌던 것이었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어도 충분히 체크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통역사판 공포체험 선물세트 같은 끔찍한 경험 후 차라리 일찍 가는 것을 택하게 되었다. 한 번은 행사장에 의자도 깔리기 전 도착해, 앉을 곳이 없어서 화장실 파우더룸 한 켠에 자료를 펴고 공부했던 일도 있었고, 같은 서울이어도 러시아워가 걱정돼 전날 근처에 숙박을 하는 일도 많다. 오늘은 5시간 반이나 일찍 도착했으니 이동 미션은 클리어. 차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들어가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오전 일정을 무사히 마친 안도감 때문인지 수마가 덮쳐왔다. 머리만 대면 지옥에서도 잘 수 있을 것 같다. 시즌에는 늘 수면 부족과 함께 한다. 초창기에는 통역과 번역과 강의와 논문까지 겹치며 사흘 밤을 거의 못 잤더니 욕조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깬 적도 있었다.      


13시. 한 시간쯤 됐을까… 꼬르륵 소리를 알람 삼아 일어난다. 30시간쯤 공복이다. 간헐적 단식도 1일 1식도 아니다. 통역 시즌에는 밥 먹을 시간을 놓치는 일이 흔하다.      


14시. 분식집에 가서 김밥과 쫄면을 시켜 한 젓가락 뜨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다다음 주, 다음 달 일정 문의다. 캘린더를 열어 테트리스하듯 일정을 맞춰 본다. 메일에는 번역 의뢰와 감수 의뢰 연락이 와 있다. 괜히 열어본 것 같다. 우걱우걱 씹으며 답장을 한다. 쫄면 속 양배추에서 번역 맛이 나는 것만 같다.      


15시. 방송국으로 들어간다. 벌써 두 달째, 매주 출근하고 있는 방송국 공개홀이다. 무대 뒷편으로 들어가니 엔지니어팀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오늘은 영어, 일본어, 러시아어, 중국어, 프랑스어. 이렇게 5개 부스가 나란히 서 있었다. 부스 속 책상 위는 엔지니어팀과 작가님이 주고 가신 간식으로 자료 놓을 공간이 없다. 통역사들 당 떨어지면 안 된다며 간식이며 주스며 가득 준비해주신 것이다. 작가님과 인사를 하고 오늘 최종 자료를 체크한다. 보통 마지막 순간까지 자료 확보가 안 되는 국제회의가 태반이지만 오늘은 방송 진행 멘트와 인터뷰 답변이 통역의 주를 이루니 마음의 여유가 있다. 오늘 내용 체크를 끝내고 짬을 이용해 다음 날 일본 출장 통역 자료를 읽어본다.  

    

16시. 파트너 선생님이 출근했다. 간단하게 오늘 통역 내용을 브리핑한다. 서로 준비한 키워드나 주의 사항 등을 체크한다. 이어서 통역 테크니컬 체크를 한다. 무대 위 음향은 통역 부스로 잘 들어오는지, 언어끼리 오디오가 겹치지는 않는지, 통역사 음성은 출연진 인이어로 잘 들어가는지 체크한다. 보통 청중들은 리시버라는 장비를 통해 통역을 듣지만 방송이니 인이어로 송출을 하는 세팅이다.      


18시 드디어 본방 시작. 출연진과 함께 웃고 즐기니 4시간의 방송 녹화도 순식간에 끝나는 기분이었다.      


22시 반 일산에서 출발해 집으로 향한다. 내일 출장짐을 싸면 오늘이 마무리되는구나~생각하니 왠지 신이 났다. 드라이브 기분이라도 내볼까. 라디오 볼륨을 올린다. 그때 메신저가 울렸다. 다음 주 총리님 일정 중 하나인 TV 출연 인터뷰 질문을 긴급하게 번역해달라는 요청이다. 내일까지 부탁한다고 한다. 내일은 아침부터 밤까지 도쿄에서 종종걸음을 하고 있을텐데. 내일 밤은 내일 밤대로 통역 준비로 살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 오늘 해서 보내는 수밖에. 어차피 미뤄봤자 내일의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23시 반. 집에 도착했다. 바닥 난 정신력과 집중력을 단전부터 다시 끌어 올려 본다. 때로는 한 페이지에 몇 시간도 걸리는데, 사람이 위기에 몰리면 알 수 없는 힘이 나오나 보다. 한 시간만에 마쳤다. 통번역사들끼리는 그 분이 오셨다고 말한다.


새벽 1시. 출장 짐을 싼다. 짐싸기는 도가 텄다. 3박 4일 해외출장 짐은 10분이면 뚝딱이다. 어차피 자료만 잘 챙기면 된다. 놀러가는 게 아니라 통역하러 가는 것이니 속옷도 세면도구도 옷도, 없으면 없는대로 어찌 어찌 해결이 된다. 한 번은 교토 출장을 가서 보니 깜박 속옷도 양말도 없이 캐리어에 자료만 가득 싣고 간 적이 있었다. 일정이 끝나고 나면 늘 새벽이라 살 곳도 마땅치 않아 밤마다 손바닥만한 드라이어로 빨래를 말린 적도 있었다. 속옷과 양말이라 다행이었다. 자료를 놓고 온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새벽 1시 반. 드디어 침대에 누워 알람을 맞춘다. 일어난 지 벌써 21시간이 지났다. 4시 반? 아냐, 혹시 모르니 4시 00분부터 5분 간격으로 쭈르륵 알람 줄을 세워본다. 어차피 3시 59분에 눈이 떠지겠지. 또 통역하는 꿈을 꾸려나? 통역 시즌에는 눈만 붙이는 것도 감지덕지다. 그래도 괜찮다. 너무나 하고 싶었던 일,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으니. 이미 충분히 감사한 삶이다. 내일은 또 어떤 돌발상황 가득한 하루가 펼쳐지려나.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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