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은 세계 1위, 자신감은 꼴지

1. 두 아이의 오후

by 송영광

이 두 장면 사이의 거리는 차로 한 시간이 채 안 된다. 하지만 두 아이가 서 있는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시험을 가장 잘 보는 나라 중 하나다. 아이들의 수학, 과학, 읽기 점수는 매번 세계 최상위권에 오른다. 여기까지는 뉴스에서 봤을 거다. 기사 제목은 늘 같지. "한국 학생, 또 세계 최상위. "


그런데 같은 아이들에게 "너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라고 물으면 고개를 젓는다. 시험은 세계에서 제일 잘 보는데 자기 자신은 믿지 못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시상대에 서서 "저는 운동을 잘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격이다. 웃기지? 웃을 수가 없다.


성적은 세계 1위인데, 자기 자신을 믿는 힘은 바닥이다.


뉴스위크 인터내셔널 편집장을 지낸 파리드 자카리아는 이 역설의 반대편을 들여다본 사람이다. 미국 학생들의 시험 점수는 늘 중간 정도다. PISA에서 자랑할 만한 순위를 가져본 적이 없지. 그런데 세계를 바꾸는 혁신은 왜 항상 미국에서 터지나. 실리콘밸리, 월스트리트, 할리우드. 자카리아는 물었다. "어떻게 시험은 이렇게 못 보는데 인생은 이렇게 잘 사는 걸까?" 그의 답은 간결했다. "시험 잘 보는 것과 인생에서 성공하는 것은 전혀 다른 능력이다. 시험은 규칙을 따르는 일이고, 성공은 대개 규칙을 깨는 일이다. " 시험 점수가 아니라 자신감이 혁신의 연료라는 이야기다.


세계적 투자가 짐 로저스는 KBS '명견만리'에 출연해 노량진 고시촌을 방문한 뒤 이렇게 말했다. "한국 10대의 장래희망이 공무원이라는 얘기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루 15시간씩 공부해서 100분의 1 합격률의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을 보며 그는 물었다. "이래서 어떻게 다른 나라와 경쟁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리만 찾고 있다. 누군가는 이걸 안정이라 부른다. 짐 로저스는 절망이라 불렀다.


경기도의 그 소년은 어떤가. 성적표도 없고 졸업장도 없다. 대신 전 세계 수만 명이 접속하는 게임을 만들었다. 외국인 팀원과 영어로 소통하고, 실수하면 유저 리뷰에서 바로 피드백이 돌아온다. "내가 이걸 만들었다"는 경험. 이것이 자기효능감이다. 시험 점수 몇 개를 올려서는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것.


2016년, 내가 IT 업계 아버지들을 모아 작은 모임을 연 적이 있다. 페이스북에 가볍게 올렸을 뿐인데 서른 명이 나왔다.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는데, 이야기의 방향이 한 곳으로 수렴했다. "살기가 점점 팍팍해진다." 이 말 끝에는 반드시 뒤따르는 문장이 있었다. "아이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아버지는 야근이 잦아 아이와 한 시간도 못 본다고 했다. 퇴근하면 아이가 이미 잠들어 있다고. 다른 아버지는 아이 학원 스케줄을 보여주며 한숨을 쉬었다. 아이도 힘들어하는 걸 안다고, 하지만 빼줄 엄두가 안 난다고. 또 다른 아버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삼성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데요, 솔직히 제가 하는 일도 10년 뒤에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이한테는 공부해서 좋은 데 취직하라고 말해요. 위선인 거 알아요. 근데 다른 말을 못 하겠어요. " 방이 조용해졌다. 자기 미래를 못 믿는 엔지니어가 아이한테는 공부하라고 한다. 코미디인지 비극인지 경계가 묘한 순간이었다.


모임은 9시 반에 시작해서 11시가 훌쩍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놀라운 건 아무도 먼저 일어서지 않았다는 거다. 마치 오래 참았던 말을 처음 꺼내는 사람들 같았다. 끝나고 나서도 여러 아버지가 자리에 남아 정리를 도왔다. 뭔가를 털어놓은 뒤의 안도, 하지만 답은 얻지 못한 채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얼굴. 아마 집에 돌아가서 아내에게는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도 같은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나도 답을 모르겠다"고 말할 수 없었겠지. 이것은 아버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머니들은 더 오래, 더 가까이에서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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