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신문기사에 없는 숫자
2013년 12월 초, 전 세계 교육 관계자들이 한 장의 성적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OECD가 3년마다 발표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 PISA. 65개국, 51만 명의 만 15세 학생이 같은 날 같은 시험을 쳤다. 수학, 읽기, 과학. 세 과목의 점수가 국가별로 집계되고, 순위가 매겨진다. 올림픽 메달처럼. 3년을 기다려 받는 전 세계 교육의 성적표였다.
결과가 공개되자 한국의 뉴스는 일제히 같은 제목을 달았다. "한국, 수학 세계 1위. " 554점. OECD 회원국 기준 단독 선두. 읽기 1~2위, 과학 2~4위. 사실상 전 과목 최상위권이었다. 올림픽이었으면 금메달 세 개. 다만 수상자가 울고 있다는 것만 빼면.
교육부 관계자들의 기자회견이 TV를 탔다. 학부모들은 묘한 안도감을 느꼈을 거다. 우리 아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증거. 수십 년간 학원비에 쏟아부은 돈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 좋은 하루였다. 신문 1면이 증명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좋은 하루.
그런데 같은 보고서, 같은 PISA 2012의 Volume III에 또 다른 순위가 있었다. 성적이 아닌 마음을 측정한 순위. 이 숫자는 어떤 신문기사에도 실리지 않았다.
내적 동기, 58위.
도구적 동기, 62위.
자아 효능감, 62위.
65개국 중.
내적 동기란 "배우는 것 자체가 즐겁습니까?"라는 질문이에요. 도구적 동기란 "이 공부가 내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으세요?"라는 질문이에요. 자아 효능감이란 "나는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세요?"라는 질문이에요. PISA는 시험 점수만 매기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마음까지 함께 측정하고 있었던 거다.
한국의 15세 아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자신감을 기록했다. 수학 1위의 아이들이 "나는 수학을 잘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는 꼴찌권이었다. 핀란드는 수학 성적이 한국보다 낮았지만 자아 효능감은 훨씬 높았다. 미국은 수학 성적이 중위권이었지만 자신감은 상위권이었지. 성적과 자신감은 보통 함께 간다. 잘하면 자신이 붙고, 못하면 위축된다. 상식적으로 그렇다. 한국의 경우는 그 상식이 완전히 역전되어 있었다.
이 두 숫자를 나란히 놓으면 기이한 초상화가 완성된다. 시험지 위에서는 세계 챔피언이지만, 거울 앞에서는 "나는 못해"라고 중얼거리는 아이. 정답을 가장 정확하게 맞히지만, 정답 너머의 세계에서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상상하지 못하는 아이. 만점짜리 시험을 돌려받고도 기쁘지 않은 아이. 다음 시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성적은 세계 1위. 자신감은 꼴찌.
이것이 신문기사에 없는 숫자다.
이 역설을 처음 봤을 때, 제품 개발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성능 벤치마크는 최고인데 사용자 만족도가 최저. 그건 제품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였다. KPI와 실제 가치가 분리된 것이지. 엔지니어들은 그런 상태를 "지표의 함정"이라 부른다. 측정하는 것만 좋아지고, 진짜 중요한 것은 나빠지는 현상. 지표의 함정에 빠진 제품은 곧 시장에서 사라진다.
한국 교육이 정확히 그 상태였다. PISA가 측정한 것은 지식의 양이었다. 문제를 풀어내는 기술적 역량이지. 같은 조사에서 측정한 자아 효능감은 그 지식을 자기 힘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지식은 가득한데 효능감이 바닥이라는 것은, 창고에 도구가 넘치는데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도구가 많을수록 더 무력해지는 사람. 성적이 오를수록 더 불안해지는 사람. 이것이 한국 교육이 만들어낸 인간 유형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구조를 들여다보면 답이 보인다. 한국의 아이들은 배움의 과정에서 한 번도 주도권을 쥐어본 적이 없었다. 무엇을 배울지는 교육부가 정하고, 언제 배울지는 학원이 정하고, 어떻게 평가받을지는 수능이 정한다. 아이에게 남는 것은 "주어진 것을 가장 빨리, 가장 정확하게 수행하는 기술"뿐이었다. 그 기술은 정교했다. PISA 수학 554점이 그 정교함의 증거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발이 묶인다. 그 질문에 답하는 연습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