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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Sep 27. 2021

엄마 머릿속 필터링

아빠를 기억하는 방법

딸 둘을 키우면서 나만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것 마냥 온갖 어려움을 토로할 때가 있다. 모범생 큰딸과 귀염둥이 둘째 딸, 나름 괜찮은 조화로 보일 수 있으나 아이 키우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된 일임을 소리 높여 외치고 싶은 여인네 중 한 명이다.



내  배 속에서 나왔지만  남을 먹이고, 씻기고 입혀서 사람다운 한 인격으로 키워내는 것이 이다지도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아이들이 젖먹이였을 때는 안아주고 먹이는 것에 그토록 애끓게 하더니, 조금 사람다운 구실을 하기 시작하자 이제는 고 자그마한 주둥이로 이 엄마를 들었 놨다 하려고 한다. 역시나 나를 시름으로 빠뜨리는 것은 대부분 둘째 녀석과 관련된 것이다. 아이는 세상 온갖 일에 시샘과 질투를 부린다. 이다지도 욕심 많은 아이를 어찌 키워야 하나 난감할 때가 무시로다.



그럴 때마다 나의 엄마는 대체 아이 셋을 어떻게 키워냈을까 싶다. 물론 나의 엄마의 엄마 시절에는 각 가구당 아이 일곱, 여덟은 당연했으니, 더욱더 처연한 마음이 들어 애초에 넘볼 수 없는 고수의 세계이다. 시골에 살 적에 엄마는 막내 남동생은 업고 양쪽에 두 딸을 데리고 홀로 버스를 타고 잘도 읍내에 다녔다.  목욕탕에도 가고 시장도 갔다가 한 보따리 짐까지 들고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무사 귀환을 했다. 목욕탕에 가면 줄줄이 딸 둘과 아들의 때를 밀어주고 마무리로 우리의 엉덩이를 팡팡 치며 “아, 예쁘다” 하면서 해맑게 웃으셨다. 마지막엔 기어이 자신의 몸의 때도 스스로 벗겨냈다. 내가 좀 머리가 영글었을 때는 엄마는 세신사에게 편히 몸 좀 맡기라고 했건만, 그녀는 억척스럽게  자신의 몸까지 스스로 마무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듯하셨다.





엄마를 만나면, 두 딸을 자랑도 했다가 슬그머니 흉도 본다. 나라고 내 아이가 어디 한없이 예쁘기만 할까. 그 흉을 볼 상대가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엄마에게 마음껏 수군거린다.


"엄마,  쟤는 대체 누굴 닮아서 저러는지 모르겠어. 나도 어릴 때 저랬어?"


"아니, 너는 그리 힘들게 군 적 없었지."


"그럼 동생들은? 걔네는 좀 힘들게 했지?"


"아니, 너희 셋 다 하나도 힘들게 한 거 없었어. 그냥 거저 자라줬지... 너희들 키우는 거 하나도 안 힘들었어."


"칫, 말도 안 돼. 내가 나를 아는데 무슨.. 사춘기 때 엄마한테 못된 말도 많이 했고만.."


"네가? 언제 그랬어? 엄마는 하나도 기억 안 나. 그저 너희 키우면서 좋기만 했는데..."


엄마 머릿속에는 필시 강력한 필터링이 들어 있는 게 틀림없다. 그토록 우리를 힘들게 했던 아빠에 대한 기억도 엄마에게 물어보면 온통 미화되어 각색되어 펼쳐진다.


추석 때 엄마를 만나 아빠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다. 띄엄띄엄 얼기설기 흩어져 있는 내 기억 조각들을 얼추 잘 꿰기 위해서는 엄마의 도움이 절실했다. 아빠의 어린 시절을 물었고, 두 분의 신혼 이야기도 물어봤다. 엄마는 "그러고 보니 딸한테는 처음 이야기하는 것 같네..." 하면서 아빠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빠 이야기를 하는 엄마 표정이 평안했다.


굳이 찔러도 되지 않을 것을, 얄궂은 딸은 기어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아빠가 밉지 않아?"


"왜 미워... 네 아빠가 엄마한테 잘했잖아."


"잘하긴... 마지막엔 그렇게 힘들게 했는데.. 엄마도 참, 그건 다 잊었어?"


"그러게.. 엄마는 그냥 좋았던 것만 생각나더라. 딸은 아빠 미워?"


"응, 엄청 미워. 이렇게 엄마 홀로 두고 그렇게 가버리고, 아빠는 마지막까지 너무 이기적이었어. 난 진짜 아빠 미웠어! 엄마.... "


"그래, 그럴 거야. 아빠가 너희 참 힘들게 했어.. 그래도 좋은 것만 생각해. 아빠 미워하면 네 마음만 더 시궁창 되는 거야. 엄마도 울적하고 슬플 때 있지 왜 없어... 그래도 엄마는 살아야 하니깐.."


"엄마가 이렇게 강한 사람인 줄 몰랐어.. 난 아빠가 강하고 엄마가 여린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완전 잘못 알았던 거야. 아빠가 그렇게 단번에 꺾일 줄은 몰랐는데...."



어릴 때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하는 엄마가 바보스럽고 너무 유약하다고만 생각됐다. 그저 투명해서 무엇이든 관통해버리는 엄마였다. 나 같았으면 담아두고 또 담아서 검게 물들어 어디론가 뿜어내고야 직성이 풀렸을 것 같은데 엄마는 그저 투명한 속으로 계속 투과시키기만 했다. 다행히도 그 안에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관하고 있었다.




신종 어플로 셀카를 찍으면 '거 뉘시오?'라고 물어봄 직한 인물이 난데없이 튀어나온다. 눈은 커지고 코는 오뚝해지고 피부에 듬성듬성 피어있는 기미들은 말끔히 개어져 맑은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


내 머릿속에도 그렇게 말갛게 해주는 필터가 장착되면 좋겠다 싶다가도 필터를 거친 사진은 영 나 같지 않다. 누구한테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는 쌩얼은 아닐지언정 내가 나라고 인정 못하겠는 걸 내보일 수는 없다. 엄마는 엄마대로 그녀의 필터링을 투과한 대로 행복하다니 먹먹했고,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나대로 아빠를 기억해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나의 필터링은 엄마와 다르게 아프고 슬픈 것들이 모조리 사라지는 마법의 필터는 아니다. 오히려 숨기고 없애고 싶었던 것을 다시 복원하고, 재건하는 것과 비슷한 과정인 듯하다.


웬디가 피터팬의 그림자를 찾아줬듯이 그저 숨기고 싶었던 나의 그림자들을 다시 꿰매는 과정이랄까. 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들춰내기 위해서는 그걸 교묘하게 감추고 있던 화려하고 두꺼운 가면을 벗어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게 나를 계속 잠식해오던 그 어둠을 정면으로 마주해보려고 글을 쓰기로 했다. 무엇보다 아빠가 너무도 그리워서 그를 기억하고 싶다.


"엄마, 나 그래도 아빠 이야기 솔직하게 하고 싶어. 이제 숨기지 않을래. 그렇게 아빠의 생(生)을 기억해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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