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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Sep 16. 2021

수타 짜장면과 곱창전골

아빠를 떠올리게 하는 것.

누군가가 보고 싶을 때 자연스레 몽글거리며  함께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 후각은 시각보다 더 원초적인 감각인 걸까.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추억과  동시에 그 음식의 까지  훅 밀려온다.


아빠를 떠올리면 두 가지 음식이 동시에 떠오른다. 아름다웠고, 아팠던 그 음식들이.



고향에서 유일했던 수타짜장면 집은 온 동네 아이들의 인기 단골집이었다.  그곳은 아빠가 근무했던 농협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게 간판 '부흥 식당'도, 널따란 작업대에서 다란 허연 손으로 면을 밀던 사장님도, 서빙하던 이모님의 길고 검었던 흙발 머리도 아스라이 떠오른다. 무엇보다  흰점 새겨진 초록색 플라스틱 그릇에 윤기 가득한 검붉은 소스에 뒤덮여 그 자태를 고이 숨기고 있던 짜장면의 그 향아직도 생각하면 코끝에서 식욕을 돋운다.



수타 짜장면



평소 나는 양파가 어느 요리에 들어가는지도 몰랐던 철부지 꼬맹이였지만, 그 짜장면에 아낌없이 듬뿍 들어가 있던 양파 맛은 기가 막힌다는 것 일찍 깨달았다. 같은 양파가 들어갈 터인데 우리 딸들은 짜장면을 먹을 때 홍해 가르듯 양파들은 다 골라내고 면과 고기 골라먹는 모양새가 아쉬울 뿐이다.


당시에는 토요일에도 학교에 갔다. 나는 토요일이 되면  학교가 끝나고 종종 농협으로 달려갔다. 짜장면 냄새가 학교까지 나를 아와 도무지 물리칠 수 없는 날들이 있었다. 아빠는 내가 농협으로 들어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면, "가서 아빠 이름 대고 짜장면 달라고 해" 하셨다. 딸내미의 눈빛만 봐도 무엇 때문에 헤벌쭉거리는지 금세 알아차리셨다. 요일에 짜장면 먹은 것은 동생들에게 당연히 비밀이었다. 난 아빠와 둘만의 비밀이 참 많은 맏딸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각자의 일정이 달랐던 우리 가족은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기 어려웠다.  손수 도넛과 피자까지 만들어주던 엄마의 부지런함은 서울에 올라와 삶의 터전에서 버티는 것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밑반찬들을 만들어 끊이지 않게 하려 애쓰셨다. 그러나 우리 삼남매는 그 반찬을 손수 꺼내서 먹는 것도 귀찮았다.


편의점을 하면서부터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된 삼각김밥과 샌드위치가 냉장고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 삼각감밥이 우리의 주식이 되었다. 온갖 신상들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나름 품평회를 하듯 시식을 해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참치마요'와 '전주비빔밥'이 진리라는 결론에 다다르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게 다 그 맛이었다. 지금은 아무리 배고파도 삼각김밥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대학 신입생 시절이었다. 저녁을 밖에서 해결 못 하고 허기짐에 배를 부여잡고 집에 도착했다. 그날은 도저히 유통기한 지난 편의점 잔해물들로 내 배를 채우고 싶지 않았다. 짜증이 절로 일었다.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 하나 하던 참에 방에 누워있던 아빠가 나왔다.


" 나가서 먹을래? 곱창전골 어때?"

곱창을 제대로 먹어본 기억은 없었다. 아빠와 단 둘이 외식은 더더욱 기억이 나지 않 때였다. 어색해하는 건 아빠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네, 가요."


당시 우리는 편의점에 가까운 경기도 철산역 근처에 살고 있었다. 철산역 뒷골목으로 나가자 그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곱창구이 집이 즐비해 있었다. 아빠는 한 곳으로 들어갔다. 작고 둥그런 식탁들이 옹기종 모여있었다. 아빠는 곱창전골을 하나 시켰고, 휴대용 버너 위에 바로 곱창전골이 올라왔다.


"끓으면 바로 드셔도 됩니다."라고 주인아주머니가 말씀하셨고, 나는 딱히 아빠와 나눌 대화가 없어서 멍하니 전골이 끓기만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소주도 한 병 주세요."라고 아빠가 말씀하셨다.

주인아주머니는 잔을 두 개 주셨고, 아빠는 내게도 잔을 하나 주셨다.

"소주 먹어봤냐?"

"신입생 환영회 때 먹어봤죠. 맛도 없고 쓰기만 하던데, 그걸 왜 먹는지 모르겠어."

"전골이랑 먹으면 맛나. 한 잔 먹어봐." 하셨다. 그날 아빠와 처음으로 술을 먹었다. 술은 어색하게 닫혀있던 입을 열어주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놈이 분명하다.  


"아빠, 힘들어?"


처음으로 물어봤다. 아빠는 그저 텅 빈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고개만 끄덕이고 술 한잔을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아빠의 눈동자에 무언가가 빠져나간 채 겨우 살아내고 있지 1년도 넘는 시간이 지고 있던 때였다.



아빠는 당시 계속 침대에 누워 "죽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누워있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고 하셨다. 너무 자고 싶은데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불면증을 호소했다. 결국 신경 정신과에 가서 수면제를 조금씩 처방받으셨지만, 그 약을 먹으면 아빠는 더더욱 어둠 깊숙한 곳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당시 아빠가 겪는 그것이 '우울증'이란 병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우울증은 우리에게는 사치스러운, 감히 아무나 걸릴 수 없는 그 어떤 것쯤으로 생각했다.


멀리 지방에 살고 있던, 신앙심 깊었던 외할머니는 아빠에게 귀신이 인 것이라고 기도를 받으면 된다면서 아빠를 모시고 유명한 기도원을 가기도 했다. 그 뒤로 아빠는 성경책을 머리맡에 두고 가끔 읽으려고 애쓰셨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나머지 가족들은 아빠의 '의지 상실'을 문제의 원인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도 저도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아빠가 벌여 놓은 일들을 온 가족이 나눠서 감당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우리 가족은 아빠가 일어나지 못한 채, 죽고 싶다고 부르짖을 때마다 저마다의 반응으로 대응했다. 엄마는 그럼 나가 죽으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고, 동생들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아빠가 하는 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 당시 나는 아빠의 "죽고 싶다"라는 말을 "살고 싶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지혜로운 큰딸이 되지 못했다. 내가 아빠에게 했던 말은 "같이 죽어."였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렇게 아빠한데 악다구니를 썼다. 아빠를 일으키는 방법은 내가 같이 죽겠다고 협박하는 것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생 새내기로 잔뜩 멋을 부리고 산뜻하게 대학 생활을 즐기고 싶었지만, 집으로 들어오면 온통 음울했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생활을 해보려고 했지만 좀처럼 학교에서도 잘 섞이지 못했다. 그것이 다 아빠 탓이라고만 생각됐다. 아빠는 내 인생의 절정기 때 왜 그렇게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고만 있는 건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그렇게 악다구니를 쏟아냈다고 변명하고 싶다.




그날, 아빠와 먹던 곱창전골의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그날 먹은 그 한 잔의 소주는 쓰지 않았다. 아빠 말대로 곱창전골과 함께 먹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아빠가 쓰디쓴 맛을 당신이 홀로 다 음미했기에 나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일지도. 아빠가 맛보고 있던, 그 죽음처럼 쓴맛을 함께 나눠 마셨으면 지금 내 마음이 조금은 덜 아플까. 오늘따라 아빠가 사줬던 그 수 짜장면이 너무도 먹고 싶다. 지금도 아빠에게 달려가 혀를 빼꼼하고 내밀면 아빠가 짠하고 군침 나는 짜장면 한 그릇을 사주실 것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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