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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Sep 02. 2021

소공녀 세라 말고, 요술 공주 '세리'

 내 이름에 얽힌 아빠 이야기

나는 9월 생이다. 그런데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은 내가 태어난 해 5월. 어릴 때는 이것이 갖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중학생 때 성에 관한 호기심이 빼꼼히 싹틀 그 무렵,  나는 서울로 먼저 전학을 와서 이모 댁에 얹혀살고 있었다. 하루는 이모가 저녁을 먹으면서 그랬다.


 "네 엄마 아빠가 또 연애를 요란스럽게도 했잖니. 속도위반으로 결혼한 건 우리 일곱 남매 중 네 엄마가 유일하다 얘... 호호호"


속도위반이란 단어를 그때 처음 들어봤다. 그럼에도 어질러 있던 퍼즐이 딱 맞듯 내 생일과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날짜의 조합으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고향 시골집에 살 적에 우리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우리 셋은 할머니와 부엌 옆에 붙어 있는 안방에서 잤고, 부모님은 별채처럼 살짝 떨어져 있는 건너방에서 두 분이 주무셨다. 엄마 옆에서 잠을 잤던 기억은 없다. 결혼하고 생각해보니 두 분의 금슬이 참 좋았던 건가 싶다. 아빠는 밤이 되면 두 분의 방으로 건너오지 말라고 늘 신신당부하셨다.


아빠는 내가 딸이란 걸 알고 바로 이름 짓기에 돌입했다고 한다. 당시 아빠가 근무하던 농협 안쪽에는 숙직실이 있었다. 종종 아빠가 숙직하는 날 농협에 따라간 적이 있다. 아빠는 직원들 책상에서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고 하셨지만 나는 몰래 이모 삼촌들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을 만져보고 랍도 조심스레 열어보곤 했다. 맛있는 간식이나 재미있는 것들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지만 나 홀로 그곳을 탐색하는 떨림과 낮과는 다른  어둠 속 그곳의 분위기가 참 좋았다. 그래서 아빠가 숙직하는 날은 동생들을 떼놓고 아빠와 단 둘이 농협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그 숙직실에서 아빠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홀로 한자 사전을 펼쳐두고 딸의 이름을 고심하셨다.


 "엄마, 큰 집 언니 오빠들 이름은 다들 작명소에 가서 지어왔다면서 내 이름은 왜 지으러 안 갔어?"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한 할아버지가 내 이름을 물어보시더니 이름이 영 별로라고 꾸짖기까지 해서 마음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나는 기껏 자리를 양보해드렸는데 남의 이름을 가지고 "세금 걷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 이름을 누가 지었기에... 쯧쯧" 하셨으니 기분이 좋을 도리가 없었다.


"그때 아마도 아빠가 직접 짓겠다고 막 밀어붙였을걸. 할아버지 한데 부탁도 안 하고 혼자 지었잖아. 네 아빠 고집을 누가 꺾겠어." 하셨다.


아빠는 늘 당신이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을 한탄하셨다. 아래로  여동생들 넷을 책임져야 해서 더 공부를 못하고 취직을 하셨다고, 혹여 자식들이 대학을 가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할까 봐  변명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배우지 못한 것의 한풀이마냥  아빠는 읽고 쓰는 것에 집착하셨다.  당시 신문 한 귀퉁이에 연재하는 수필이나 시를 고는 다른 공책에 꼭 필사를 하곤 하셨다. 자신이 쓴 글을 신문사에 자주 투고를 해서 지방 신문에 몇 번 실린 적도 있으시다. 필사하는  버릇은 예기치 못한 이른 퇴직 후에 pc방을 거쳐 편의점을 운영하며 하루 12시간 가까이 홀로 가게를 지켜야 할 때 아빠의 큰 낙이 돼주었으리라 짐작한다.(그리 믿고 싶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가게를 정리할 때  영수증, 문화상품권 봉투 뒷장에 아빠가 빼곡히 적어둔 좋은 글귀들을 찾을 수 있었다.


아빠가 <소공녀>를 읽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로부터 유명한 명작 <소공녀>의 주인공 이름이 '세라'라고 들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 뒤로 아빠는 내 이름을 세라라고 지으려고 했다고 엄마는 알려주셨다.


 "세라라고 하지!!! 세라가 훨씬 예쁜데!" 엄마에게 듣고는 철없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아빠는 세라라는 음을 먼저 짓고 그에 어울리는 한자를 찾으셨지만 마땅한 조합을 찾지 못했다. 요즘은 그냥 한자 없이 한글로만 이름을 짓기도 하지만 당시 공문서에는 꼭 한글 옆에 한자를 적어야 했으니 아빠로서는 한자를 생략하는 파격적인 생각은 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래서 그다음 후보지로 '세리'가 올랐고, 아빠는 한자 사전을 뒤지고 뒤져서 그에 맞는 한자음을 찾아냈다. 이름에는 거의 붙이지 않는 한자를 사용했다고, 이후에 내 이름을 한자로 써내야 하는 담임 선생님들마다 한 마디씩 하시곤 했다. 아무렴 어떠랴, 나는 좋을 , 바를 의 한자음을 가진 세리였다.(런, 네이버 사전을 아무리 뒤져도 내 한자를 찾을 수 없었다.)


세리란 이름은 시골 마을에서 무척이나 튀는 이름이었다. 당신 친했던 친구들은 수경, 은숙, 은혜, 미선 같은 이름이었다.


동네 어른들은 내가 걸어 다니면 "요술공주 쎄리 왔어?"라고 놀리곤 하셨다. 가 여섯 살이 되는 무렵부터 일본 만화가 원작인 <요술 공주 세리>가 방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화에 빠져 있던 동네 언니들은 나만 보면 "요술 공주 쎄리가 찾아왔어요. 별나라에서 지구로 찾아왔어요. 세리~~ 세리~~"하면서 떼창을 불러대곤 했다. 요술공주 세리로 불리는 것은 썩 나쁘지 않았다. 공주라고 불려지니 민망할지언정 분명 나쁠 일은 아니었다.


만화 영화 <요술공주 세리> 출처: 네이버 지식사전


나는 골프신동 '박세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줄곧 공주란 타이틀을 별명으로 갖고 자랐다. 결과적으로 귀공녀 세라보다 한 단계 격상된 신분의 공주님이었으니 아빠의 바람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할까.


진짜로 나는 아빠의 공주님이었다. 문제는 나를 공주로 키워주신 아빠의 수고를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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