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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Sep 30. 2021

아빠의 등

업히고 싶은, 그런 날




엄마의 친정금산은 지금도 인삼으로 유명한 이다. 어릴 적 외할머니댁에 가면 동네 여인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인삼을 산처럼 쌓아놓고는 껍질을 열심히 까고 있었다. 모두 손톱 밑에 까만 물이 든,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쉴 새 없이 허물을 벗기며 그 산더미를 하나둘씩 허물곤 하셨다. 지금은 허리가 폴더처 접힌 채 고물 유모차를 끌며 힘겹게 한 걸음씩 내딛는 외할머니를 보면, 그때 산처럼 쌓여있던 인삼 더미들이 아낙네들에게 공으로 살림 밑천을 내어준 것이 아니었구나 싶다.



인삼의 고장, 금산에서는 해마다 인삼 축제를 크게 열곤 했다. 그 한때만이라도 인삼으로 먹고 살던 동네 주민들이 모두 모여 서로 간의 고단함을 주고, 심심한 위로가 돼주는 풍류를  즐기곤 했다. 우리 가족도 종종 그 축제를 찾아가서 구경하곤 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무대에서 벌어지는 노래자랑이었다. 비록 아마추어들의 향연이었지만 화려한 조명 아래 펼쳐지는 노래자랑을 보는 것은 낯선 설렘을 줬다. 그렇게 온 가족이 그 생경한 것에 한참을 정신이 팔려있을 때, 엄마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여보, 일이가 없어! 일이 어디 있지?" 막내 남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아빠는 무리에서 냅다 튀어 나가 "일아!!"라고 소리치며 군중을 헤집고 다니셨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데도 무리를 가르며 하나뿐인 아들을 부르던 아빠 커다란 등이 어둠 속에서도 반짝였다.  


다행히 동생은 누군가 손에 이끌려 무대 위로 올려져 사회자의 커다란 목소리로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님은 무대 근처로 오세요."라고 광고됐고, 아찔했던 그 사건은 떠들썩한 에피소드를 남기며 마무리됐다. 그때 아빠는 겁에 질려 엉엉 울던 동생을  등에 업어  돌아왔었다. 전쟁터에 나갔다가 승전보를 울리며 귀향하는 장군마냥 아빠 등은 넓었다. 아빠 등에 업혀 떨며 흐느끼는 동생을 보며 안도감이 들었다. 한편으론 아주 잠깐이었지만, 잃었다 다시 돌아온 남동생한시샘이 났다.





큰아이는 가끔 외할아버지를 기억하노라고 말한다.


"엄마, 나 할버지가 편의점에서 소지랑 우유 줬던 거 기억나요!"


"진짜? 그때 은서가 4살이었는데... 기억이 나?"


"네. 편의점에 그 위로 열리는 문 있었죠? 그거 열고 할아버지가 나도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줬어요. 거기 할아버지 무릎에서 소지 먹었던 거 생각나요."


내가 첫 아이를 낳고 친정에 갈 때면 아빠는 친정집에서 편의점까지 가는 길에 아이를  등에 업다. 4살 아이의 걸음으로 꽤 먼 거리이기도 했지만 힘들다고 그만 내려놓으라고 만류해도 굳이 업고 편의점까지 가셨다. 아빠의 작아진 등에 꼬물거리는 생명이 업혀 가는 모습을 뒤에서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이의 생령력이 아빠의 고된 인생살이로 굽은 등을 다시 펴낼 수 있길 바라고 또 바랐다.


아빠와 큰 아이


큰아이가 이렇게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말하면, 옆에서 둘째 아이는 날 선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보다가 기어이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나는  왜 외할버지가 없어?!!!

나도 언니처럼 외할버지가 소지 사줬으면 좋겠어. 왜 할아버지는 나 태어났을 때  돌아가신 건데!!"라고 생떼를 쓰며 제 언니만 가진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시샘하는 것이다.


퍽 난감하다.  

받아도 받아도 채워지지 않는 듯,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외할아버지의 사랑까지 얹어졌다면 아이의 갈증이 조금 해갈됐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아이의 생떼로 인해 아빠의 등이 더욱 그리운 날이다.




아버지의 등

-정철훈-



만취한 아버지가 자정 너머
휘적휘적 들어서던 소리
마루바닥에 쿵, 하고
고목 쓰러지던 소리

숨을 죽이다
한참만에 나가보았다
거기 세상을 등지듯 모로 눕힌
아버지의 검은 등짝
아버지는 왜 모든 꿈을 꺼버렸을까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검은 등짝은 말이 없고
삼십 년이나 지난 어느 날
아버지처럼 휘적휘적 귀가한 나 또한
다 큰 자식들에게
내 서러운 등짝을 들키고 말았다

슬며시 홑청이불을 덮어주고 가는
딸년 땜에 일부러 코를 고는데
바로 그 손길로 내가 아버지를 묻고
나 또한 그렇게 묻힐 것이니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서러운 등짝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검은 등짝은 말이 없다





커버 사진: © brittaniburns,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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