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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Oct 05. 2021

아빠의 불면증

우울증의 시작


아빠가 농협을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둘째 고모부를 많이 의지하고 있어서였다. 농협에서 대출계에 있던 아빠에게 고모부는  혀처럼 굴며 서울에서 그토록 먼 거리를 종종 오가며 아빠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가 서울에서 무슨 사업을 하는지 정확히 몰랐지만, 고모부가 번뜩거리게 윤이 나는 검은 세단을 끌고 시골 등장하면 주변 공기가 달라짐을 느꼈다. 아빠가 농협을 미련 없이 그만두신 것도 서울에 올라오면 자신이 다 알아서 형님 모실 거니 걱정하지 말라던 고모부의 듬직한 뒷배를 믿었던 이유가 컸던  것이다.


그렇게 아빠가 서울에 올라와서 고모부 소개로 처음 차린 사업이 오락실이었다. 당시 고모부는 신림동 서울대 입구역 근처에 큰 오락실과 도박장을 몇 개 운영하고 있었다. 서울대입구역에 내려서 아빠 오락실을 갈 때면 오락실 손님들이 과연 서울대 학생일까 하는 순진한 궁금증이 일곤 했다.



농협에서 일하던 아빠가 오락실에서  능숙하게 할 수 있던  일은 동전 세는 일뿐이었으리라. 오락실을 시작으로 당시 유행하던 펌프(DDR) 기계를 들여놓으며 일을 확장했지만 잘되지 았다. 결국, PC방으로 사업 테마를 옮기셨다. 피시방은 대형 학원가가 즐비했던 노량진에 있었다.  아빠가 진입했을 때부터 이미 레드오션인 사업이었다. 노량진역에서 아빠 피시방까지 가는 길에 사방에 보이는 피시방 간판을 세다가 10개가 넘어가자 세는 걸 그만던 적이 있다.




피시방은 KFC 옆 건물에 있었는데, 철없던 나는 아빠 가게에 가면 꼭  아빠에게 1,000원을 받아서 KFC 비스킷을 사 먹었다. 양쪽으로 포개지며 앙증맞게 삐져나오는 딸기잼을 그 따끈한 것에  고이 발라 먹는 그 맛이란.  그 즐거움 때문에 아빠가 그곳에서 계속 PC방을 했으면 바랐다. 밤새 게임을 하다 학생들이 남기고 간 라면 국물처럼 아빠가 쪼그라드는 것은 제대로 보질 못했다.


아빠는 업종을 또 바야 했다.  그 사이에 이제 자영업은 못 하겠다며  월급을 받을 수 있는 택시를 해보겠다고 택시 회사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매일 회사에 내야 하는 사납금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날이 더 길었다. 아빠는 서울에서 운전은 힘들다 싶었는지 몇달만에 포기하셨다.  결국 그의 마지막 생의 터전이 된 곳은 편의점이었다.


 

아빠가 서울에 상경해서 했던 모든 업종은 밤낮 구분이 없는 것이었다.


 


아주 어릴 부터 농협 사환으로 시작해 정규직으로 농협 직원이 서 부장까지 다다를 때까지, 그 시대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하셨듯이 나의 아버지도 부지런함을 무기로 열심히 사셨다. 요새 단어로 말하면 아빠는 형적인 '아침형 인간'이었다. 새벽 5시 되기 전에 일어나서 동네 중학교에 가서 테니스를 치고, 오면서 약수터도 들려 마무리 운동을 하고 집에 와서 우리를 우곤 하셨다.



그 시절에 종종 아빠가  '세리야'라고 한마디만 하면 벌떡 일어나 아빠를 따라나섰다. 아빠가 테니스를 치는 동안 운동장을 어슬렁거리며 철봉에도 매달렸다가  테니스공을 던져보기도 하면서 놀았다.  당시 아빠가 늦게까지 야근을 했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가끔 숙직하는 날, 아예 밤을 농협에서 지새우는 은 있을지언정 밤늦도록 농협에서 야근하는 환경은 아니었다. 늘 정시에 퇴근해서 집에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엄마가 갓 지어준 저녁을 함께 먹곤 했다.


렇게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며 아빠가 서울에서 24시간 닫을 수 없는 가게를 운영하니 그 몸과 정신이 온전히 버티 못할 만도 했다. 차라리 몸이 먼저 망가지셨다면 온 가족이 그리도 모질게 반응하지 않았을까. 아빠는 몸이 아닌 정신이 먼저 무너다. 그토록 근면하고 건강하던 아빠는 정신의 한 면이 찌그러지자 모든 것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정신에 난 한 올의  생채기는 기어이 아빠의 육신까지 좀먹기 시작했다. 결국, 자리에 몸져누웠다. 그 첫 증상은 '불면증'이었다.



너무도 피곤하고 몹시도 잠들고 싶지만 좀처럼 깊이 잠들 수 없다고 하셨다. 당시 아빠와 번갈아 가게를 지켜야 했던 엄마는 머리만 에 대면 바로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다. 아빠는 엄마가 그렇게 코를 골고 잠드는 것이 꼴 보기 싫다고 하셨다. 당신은 잠들지 못한 채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는데 어떻게 그렇게 코까지 골면서 달게 잘 수 있냐고 말이다. 엄마로서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궤변일 뿐이었다. 잠 못 드는 남편 옆에서 같이 뜬눈으로 밤과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거늘, 아빠는 그저 모든 것 서러워하셨다.


불면증으로 잠 못 드는 날이 많아지면서  아빠는  낮에 기운 빠진 노새처럼 수시로 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예 자리에 누워 자신은 가게를 나가지 못하겠으니 가족들 보고 알아서 운영하라고 했다. 처음에 아빠의 상태를 마주한 우리 가족은 놀랐고, 당황스러웠고 일단은 수습하기 바빴다. 우리 삼 남매는 다 공부하는 학생들이었지만 조를 짜서 편의점 나가서 가게를 봤고, 아르바이트생을 구해서 어떻게든 24시간 멈추지 않 돌아가게 했다.


 




우울증. 그 병에 대해서 우리는 무지했다. 미디어의 파급력 때문인지, 연예인의 영향력 때문인지 '공황장애'나 '우울증' 같은 정신병들이 이제는 누구나 걸릴 수 있는 흔하고 대중적인 질환으로 알려진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겪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간극이 있다. 아빠의 우울증은 장마철 피어나는 화장실 곰팡이처럼 가족 모두에게 습하고 끈적하게 퍼져나갔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야 했지만, 그 끈적한 놈은 어디를 가든 따라붙었다. 공부할 때도, 친구들과 놀 때도 그 음습함이 계속해서 내 주위에 번져나갔다. 막상 그 근원을 찾아내  박박 닦아 없애고 싶었지만, 도무지 찾아낼 방도를  알 수가 없었다.


아빠를 이해하려고 그 하소연을 들어주기도 했고, 소리를 지르기도, 협박해보기도 했다. "제발 정신 차리세요!!"라고 온 가족이 매달렸다. 누구도 우리에게 우울증이 걸린 가족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이가 없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인 줄 알았다. 곧 강력한 햇볕이 비추면 그 추악한 곰팡이들이 깡그리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은 지하 구석진 자리로 먼저 찾아와 주지 않았다.


우두커니 앉아서 멍하게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던 아빠의 텅 빈 눈빛은 그것을 보고 있는 로 하여금  뜨거운 분노를 쏟아내는 야누스로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잠만 제대로 잘 수 있으면 더 소원이 없겠어." 라던 아빠의 하소연 앞에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아빠는 병원에 다니면서 수면제인 졸피뎀을 처방받아  주무시곤 했지만, 그것  아빠 삶에 근본인 해결책이 돼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커버사진 : © sashafreemind,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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